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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9일 김대중이 이틀 전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는 선언을 하자 김영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영삼 또한 계엄령의 해제,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종필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당은 김영삼의 요구에 반응하였고 계엄 해제 문제를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80년 5월 10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최규하는 7박 8일 일정으로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한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동으로 간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국할 때에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의 7만여 명이 서울 중심가를 메우며 야간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운동이 더욱 심해지자 내무부장관 김종환은 국무총리 신현확에게 말했다. 경찰력만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군의 투입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학생 시위는 격렬하였으며 경찰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의 24개 대학 대학생들도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날의 시위 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래없는 유혈 사태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1.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겠다. 2. 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3.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 해제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대 대표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서울대 학생회 회장 심재철은 신현확의 말을 믿고 해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학교 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으니 계속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심재철은 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결국 정부는 군을 투입시킬 것이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대측을 설득하였고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학생 시위는 해산되어 정부는 한 숨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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