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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사상== "신은 죽었다."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현대 실존주의 철학과 현대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니체의 사상은 프리메이슨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 놓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일부 [[사탄]]의 교회에서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경전으로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 니체는 독일 레켄 출생으로 목사인 아버지를 5살 때 사별하고, 어머니, 누이동생과 할머니 집에서 자랐으며,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문학에 몰두했으며,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철학과 바그너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1872년 '비극의 탄생'이라는 지식에 반항하는 디오니소스적(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하는)인 저서를 내 놓았다.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저서에서는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이라고 단정 짓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시도하였다. 1885년 그의 대표적인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어었다."고 단정 짓고, "[[권력에의 의지]]"를 [[인생]]의 가치요 목표로 삼았고, [[초인]](超人)사상과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한 삶의 긍정을 제시했다. 니체는 1888년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토리노 광장에서 졸도하였고, 정신병원에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 후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고, [[유럽]]에서 [[기독교]]의 몰락과 실존주의의 부흥에 기여하였다. 그는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 없이 자기 극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의 철학]](Philosophy of Life)===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어난 철학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생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직관이나 체험, 육감 등을 이용해 이해할 수 있다는 철학사조이다. 생의 철학의 시조인 쇼펜하우어는 '생에의 맹목적 의지'를 주장하였고, 니체는 생을 '권력에의 의지', 지멜은 '초월의 내재', 베르그송은 '생명의 비약'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고민하던 '인생을 왜 사는가?'에 대해 누구나 이성으로 명확히 답변할 수 없으니, 증명할 수는 없지만 직관적인 판단하에 이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직관은 이성보다도 부정확하며, 이는 단지 나름대로의 추측이나 가정이지 진리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나도 고등학교 내내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인생은 훨훨 타다가 때가 되면 재가 되는 모닥불 같다.'이다. '''아무리 고민하고 과학적, 이성적, 직관적, 감정적 방법을 총 동원해도 인생에 대한 해답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 세상에 내 던져진 피동적 존재로 저차원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정확한 의도는 작가만 알지, 다른 사람의 의견은 추측이요 가정일 뿐이다. 이와 같이 우주와 인간을 만든 정확한 의도는 오직 창조주인 하나님만이 알지, 우리가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해답은 오직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인간은 영과 육신을 가지고 그 존재목적이 서로 다르다. '''육신은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살기 위해서 산다는 모순율적인 명제처럼 보이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생존]] 자체가 목적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고, 삶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우리는 심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일하고, 먹고, 자고, 호흡하고, 화장실 가는 것 모두가 나의 생존을 위한 행동이다. 그러나 모든 동물은 나이가 들면 늙거나 병들어 죽기 때문에 그 전에 생식을 통해 자손을 번창함으로 생을 지속한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의 생식활동은 생을 영속시켜 대가 끊기거나 멸종되지 않기 위한 활동이다. '''일시적 삶을 위해 내재된 프로그램이 생존본능이며, 영속적인 삶을 위해 내재된 프로그램이 생식본능이다.''' 누구나 자유로운 듯 하지만 이 본능이라는 코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배가 고프면 허겁지겁 밥을 먹어야 하고, 숨을 오래 참을 수 없으며, 졸리면 버스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자야 하다. 화장실 가야겠다는 신호가 오면 체면 불구하고 100m 달리기를 해서 화장실에 터치다운 해야 한다.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 키 크고, 잘 생기고, 지적인 배우자를 찾는다. '''이에 반해 내 영혼은 구원 받기 위해 산다.''' 죄사함으로 끊어졌던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 성장하며, 천국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성(靈性)보다는 육성(肉性)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영혼의 요구를 외면한 채 육적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육적인 욕망을 자제해야 하며, 영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겁회귀(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 [[불교]]의 [[윤회사상]]과 같은 것으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내 세운 사상이다. 영겁회귀는 시간이 원형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사물이 무한히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원래 [[힌두교]]에서 유래되었는데, 힌두교를 개혁하고자 한 석가도 이 윤회사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기독교]]의 직선적 역사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윤회사상은 사탄이 지어낸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석가는 영원히 반복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니체는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신이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는 생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히브리서 9/27) 니체가 윤회사상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형이상학을 인정하면서 신을 믿지 않으려면 윤회사상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회사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영원토록 생을 순환시키는 주체는 또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놀이동산에서 회전운동을 하는 놀이기구는 이를 순환시키는 모터와 동력이 있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결과가 있다면 이에 걸맞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요즘 TV에서 최면상태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전생]]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악령]]이나 [[악마]]가 대신 대답하는 것이다. ===초인(超人, Super Man)===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시한,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제약을 극복한 이상적 인간을 말한다. 인간은 중간자(中間者)로 자신을 극복하면 초극적(超克的)인 절대존재 즉 [[초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쾌락에만 빠져 살다가 생명을 잃어버리는 말인(末人)이 된다고 니체는 주장했다. 이 역시 석가의 '누구나 [[성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에서 모방해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니체는 초인이 신이 될 뿐만 아니라 신을 대신해 [[인류]]를 [[지배]]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초인사상을 주창한 니체가 평생 질병에 시달리다가 정신질환자가 되어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인간은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사탄의 거짓말에 속는 사람만 억울한 것이다. ===선악의 피안(善惡-彼岸, Jenseits von Gut und Bose, Beyond Good and Evil)=== 피안은 강 저쪽 둔덕이라는 의미로 차안(此岸:현세를 가리키는 말)의 상대어로,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불교의 해탈과 같이 세속(世俗)으로부터 초월한다는 뜻을 표현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니체는 도덕을 '지배자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구분하였다. '지배자 도덕'은 유대인의 세계정복 음모인 시온의정서에 있는 '힘은 곧 정의다.'와 같은 것이다. 즉, 선악의 분별이나 양심을 버리고, 권력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하는 것을 오히려 선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사탄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만든 것으로, [[스탈린]]이나 [[모택동]]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 수천만명을 학살한 것도 혁명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합리화 된 적이 있다. '노예 도덕'은 약자가 강자가 힘으로 저지르는 악행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힘이 없어 당하는 니가 잘못이다.'라고 빈정거리는 간교한 사탄의 말투가 드러나는 듯 하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고 비판하였고, 선악이라는 개념을 넘어설 때 자유로운 이상세계가 열린다는 점에서 '선악의 피안'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연쇄 살인범이 양심의 가책 없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사기꾼이 아무 거리낌 없는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것이 이상세계라는 것인데, 이는 불교에서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막 나가자는 이야기이다. 니체는 정신병에 걸리기 2년 전인 1886년 '선악의 피안'라는 저서를 통해 도덕이나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선악의 피안'이라는 사상을 전함으로써 완전히 사탄의 사상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니힐리즘]](Nihilism)=== 라틴어에서 무(無)를 뜻하는 니힐(Nihil)을 어원으로 하는 허무주의적인 사상으로 모든 것이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無)라는 사상이다. 원래 불교의 중심 사상인데, 서양에서는 [[니체]]나 [[도스트예프스키]] 등이 도입해 철학적으로 이해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니힐리즘은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는 '절망적 니힐리즘'으로 일체의 사상을 부정하고, 인생에 아무 의의도 없다고 규정하고, 모든 일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채 순간적인 쾌락에만 몰두하는 경향이다. [[회의주의]], [[상대주의]], [[무정부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히피]] 문화 등이 이에 속한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대부분 인생에 목적을 상실한 채 먹고 사는데 연연하거나 쾌락을 찾아 다닌다. 두 번째는 무(無)를 그대로 받아들여 긍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모색해 보자는 실존주의적인 입장이다. 실존(현상적 존재)은 본질(이상적 원형)의 반대되는 말로 이상세계를 접어 두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의의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형이상학을 인정하면서도 부인하고, 이 세상을 부정하면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유물론과는 다르다. 니체는 기독교나 불교의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비판하고, 일체의 기성가치(旣成價値)를 가차 없이 공격해 파괴해야 한다는 능동적 니힐리즘(Activer Nihilismus)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 허무와 절망에서 벗어나 실재와 희망을 찾아 나서는 것이란 것을 간과한 것이다. 기존의 도덕과 가치를 파괴하면 돌아오는 것은 혼란과 타락과 폭력과 살인과 가정파괴와 전쟁 밖에는 없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신과의 단절로 인간은 자아를 상실해 존재의의와 목적을 상실한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 영원한 죽음의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고 하였다. 이 세상의 일시적인 희망에 기대에 살지 말고, 오히려 철저히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인식함으로써 초월자이자 주관자인 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병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존재(일시적 존재)인 인간은 세상의 일상과 관습에 묻혀 살지만, 비 본래적(가상적)인 존재양식으로부터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현존재인 인간은 시간성 안에 놓여 있고,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지 말고, 양심을 통해 본래의 존재방식 (본질적 자아)로 돌아가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5년 완성된 니체의 대표작으로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겁회귀 등의 사상이 담겨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를 창설한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이름으로 여기서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현자를 말한다. 여기서 짜라투스트라는 신은 죽었다고 단정하고 신을 모독하는 자로 불리우기를 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또한 자신이 신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미친 사람으로 불리우기를 원했다. 그런데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영원토록 죽지 않는 영원 불변의 존재인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인 모순이다. 죽는다는 것은 이미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무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의식 있는 [[철학자]]라면 [[형이상학]]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있는 존재를 억지로 부정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눈 앞에 세계가 있는데도 눈을 감고 세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신을 죽인 이유가 신이 자신 속에 있는 치욕과 추악함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참을 수 없었고 분노가 치솟아 올라 복수하는 마음으로 신을 죽였다고 한다. 마치 사탄의 음성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실제로 이 책은 사탄의 영감을 받아 쓰여져 사탄의 깊은 심정을 알 수 있다. [[청소년]]은 [[사춘기]]에 [[부모]]가 관심을 가지고 간섭하는 것이 못마땅해 반항심이 생기고 가출하게 된다. 그러나 가출해 세상의 사악함을 느끼고 고생하다 보면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신은 인간을 감시의 눈길로 쳐다 보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눈길로 지켜 본다. 끊어진 신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길 중의 하나는 신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은 아는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주장하게 된 경위를 사탄의 입장에서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한 때 지혜와 능력이 충만했던 케루빔으로 신이 되고 싶었다. 수 많은 [[천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깝게 실패했다.<br>천국에서 쫓겨나 지하로 내려 오니 너무 괴롭고 힘들다. 이렇게 된 것이 분하고 억울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신이 너무나도 밉다.<br>복수하고 싶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신은 죽었다.'고 자기암시라도 하고 산다.<br>그나마 지하에서 수많은 [[악령]]([[악마]])들을 거느리고 추앙 받으며 왕노릇 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br>또한 지상에서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을 타락시켜 [[지옥]]으로 끌고 와 괴롭히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언젠가는 지상마저도 정복하리라!" 이런 전후사정이 생략된 채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자신이 죽은 것이다. 사람 역시 죄로 인해 신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사람은 아무리 신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 오직 예수가 대속한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야 신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어 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기암시는 우리 인간도 많이 한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빨리 지나가고,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벽을 향해 매일 매일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 예를 들면 사자(죽음)에게 쫓기는 타조(사람)가 달아나다가 힘이 빠져서 수풀에 머리를 박고 열매를 먹으며 사자가 없다고 자기암시하는 것 같이 우리 또한 세상의 즐거움에 파 묻혀 살면서 공포스러운 죽음이 없다고 자기암시하면서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솔직히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신 따위는 사라져라! 차라리 신은 없는 편이 낫다. 혼자서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낫다. 바보가 되는 편이 낫다.<br>스스로 신이 되는 편이 낫다. 그대 내부의 어떤 신이 그대를 무신론자로 만들었다. 신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경건 그 자체가 아닌가?" (324f) 차라투스트라(사탄)가 이렇게 거짓말로 인간이 신과 멀어지게 하는 이유는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에게 시기 질투가 나고, 한 명이라도 더 지옥에 이끌므로써 인간 괴롭히는 낙이라도 느끼며 살기 위해서이다. 몇년 전 일본에서 한 남자가 명문 유치원에 침입해 어린 아이 8명을 칼로 살해 했는데, 그는 자신은 실업자 신세로 처량한데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에게 시기 질투와 분노가 일어나 범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하였다. 차라투스트라는 분노의 근거로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내 세운다. 구역질은 같은 생이 끊임 없이 반복되는데서 온다고 한다. 사탄은 [[힌두교]]에서 설파했던 거짓말인 윤회사상을 여기서도 써 먹고 있으며, 모든 것이 회귀하기 때문에 모든 노력과 선행, 진리 등이 무가치하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규범을 파괴할 때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이 허무한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 애쓰지 말고 '[[권력에의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아가라고 충고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권력을 얻기 위해 양심을 던져 버리고 사기 치고, 도둑질 하고, 강도 짓 하고, 명예나 권력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고, 부정 선거 하고, 음모를 일삼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과연 돈이나 명예가 인생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돈과 명예를 얻었다 할지라도 늙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고, 허탈하고 우울한 감정은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이 권력에의 의지는 굳이 니체의 사상을 몰라도 절망한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은 게임 속에서 파괴하고, 죽이고, 권력을 쟁취하며 희열을 느끼게 된다. 보통 범죄자를이 흉악한 죄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인생의 목적을 잃어 버리고 절망해, 살인하고 도덕질 하는 등 잔인하고 파괴적인 것에 의의를 두기 때문이다. 사탄 또한 생의 목적을 상실한 채 오직 모든 것을 파괴하고, 타락시키고, 권력을 쟁취하는 데 의의를 두고 살고 있으며, 결국 이 세상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지만, 신으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 본질(Essense)은 현상세계의 원형과 원인이 되고, 그에 반대 개념인 현재적 존재를 실존(Existence)이라고 한다. 하이데거나 야스퍼스가 선구자이며, 특히 인간의 존재를 실존이라 하며 이에 대해 탐구했다. 야스퍼스는 실존적 자아를 사유와 행동의 근원이며, 초월자나 다른 실존과 관련 속에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야스퍼스]]와 [[키에르케고르]]는 유신론적 실존철학자인데 반해 [[니체]], [[하이데거]], [[샤르트르]], [[까뮈]]는 무신론적 실존철학자이다. 샤르트르는 행동하는 인간을 주장했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보았다. 샤르트르는 실존이 오히려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하며 실존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무(無)에서 존재하는 실존이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에 의해서 자신을 만들어 나가며, 자신이 선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샤르트르의 휴머니즘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고, 사회를 변혁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택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병이나 사고 등으로 죽기 쉽고, 개인주의적인 사회는 파멸로 치닫고 있고,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지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존재이다. 결국 서양철학은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갈래 입장의 대립의 역사이다.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border="1" |- | 신본주의 || 절대적 진리 || 형이상학 || 본질 || 원인 || 원형 || 영 || 실제 || 이상 || 실체 |- | 인본주의 || 상대적 진리 || 형이하학 || 실존 || 결과 || 모형 || 육 || 가상 || 불완전 || 현상 |- |} 한 부류는 신을 중심하고 의지하며,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고, 본질에 관심을 두며, 원인적 세계를 고찰하고, 영적인 생활을 하며, 실제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하고, 영원토록 존재하는 실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입장이다. 다른 부류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개개인의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며, 실존적 세계와 결과적인 세계에 관심을 두고, 모형적 세계를 좋아하며, 육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살고, 가상적 세계에서 허무함을 느끼며, 불완전한 세계에서 심한 혼란을 겪다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적 삶을 살다 가자는 입장이다. 이 둘 간의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누가 옳은지는 사(死) 후, 또는 마지막 때 판가름이 날 것이다.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border;1px" ! !! [[형이상학]] !! [[형이하학]] !! 인식의 주체 |- | 그리스 철학([[플라톤]]) || O || O || 선의 이데아 |- | 관념론([[칸트]]) || O || X || 나 |- | 실존주의([[니체]]), 불교([[석가모니]]) || X || X || 나 |- | 유물론([[마르크스]]) || X || O || 나 |- | 기독교([[야훼]]) || ○ || △ || 신 |- |}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 위와 같다. 서양철학의 큰 줄기인 4가지 유형과 기독교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우주에 대한 인식의 주체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는다. 하나씩 살펴 보겠다. ====그리스 철학(플라톤)==== 서양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플라톤]]은 이 세계는 이상적 세계의 그림자라고 했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인 이데아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서로 다른 고양이를 고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고양이가 이상적인 고양이를 불완전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4인설을 통해 형이상학을 구체화 했다.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사도 [[파울루스]]는 유대 제사 때 쓰는 기물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늘에 원형이나 설계도가 있고, 이 세상의 것은 하늘 세계를 본 따서 만든 모형적 세계요, 가상(그림자)적 세계이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완벽한 원이나 삼각형을 그리려고 해도 오차 때문에 완변한 도형을 그릴 수 없다. ====관념론(칸트)==== [[관념론]](idealism)은 유물론에 대립하며, 관념적(이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앞선다는 입장이다. 언뜻 보기에 신본주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로 우주의 인식의 주체가 인간이고, 인간이 인식함으로 우주가 존재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입장이다. 관념론은 [[데카르트]]가 초석을 깔았고, [[칸트]]가 발전시켰으며, [[헤겔]]이 완성했다. 프랑스의 수학자 겸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모든 가설에 의심을 품고, 학문을 하려면 확실한 가정을 먼저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해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제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를 제 1명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볼 때는 맞아 보이는 이 명제 역시 증명되지도, 논리적이지도, 실증적이지도 않은 불확실한 명제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의미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즉, '나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중세의 신본주의를 무너뜨리는 이 혁명적인 사상으로 서양은 물질주의로 빠져들었고, 실존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필자는 데카르트의 제 1명제를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또는 '''나는 신의 인식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다. 만약 생각함으로 존재한다면 뇌사 상태에 빠져서 생각할 수 없는 환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돌 덩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공지능 컴퓨터는 생각할 수 있으므로 존재할까? 먼저,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사고와 관계 없이 신이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100년을 산다 한들 우주 나이 200억년에 비하면 2천만 분에 1에 불과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500km라고 가정했을 때 2천만분에 1은 겨우 2.5cm에 해당한다. 우주 나이에 비하면 우리 인생은 카메라 플레쉬 터지는 것만큼이나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카메라 플레쉬 불빛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우주에는 1,000억개의 은하계가 있고, 은하계에는 1,000억개의 별이 있으며, 우주의 크기는 빛의 속도로 200억년 가야 하는 200억 광년이다. 그렇다면 우주에는 1,000억×1,000억=1022개의 별이 있는 것인데 이 우주의 크기와 별들의 수에 비하면 지구는 드넓은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보다 작은 존재이다. 지구상의 모래 밀도와 면적을 계산하면 모래 숫자를 셀 수 있는데, 우주에 있는 별의 숫자와 같은 1022개이다. 신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많이 주겠다 하는 말을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고 하셔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가 엄청나게 많은 숫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서에서도 하늘의 별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다고 수천 년 전부터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지구의 크기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모래알에 붙어 있는 미생물처럼 작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래알에 붙어 있는 미생물이 존재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신이 우주의 크기와 시간을 광대하게 만드신 이유는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이사야 40/12~15 ''누가 오목한 손바닥으로 물들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되로 땅의 먼지를 담아 보았으며 큰 저울로 산들을, 작은 저울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느냐? 누가 주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분의 모사(謀士)가 되어 그분을 가르쳤느냐? 그분께서 누구와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분께 교훈을 주었으며 의의 길로 그분을 가르쳤으며 그분께 지식을 가르치고 명철(明哲)의 길을 보여 주었느냐? 보라, 민족들은 물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그들은 저울의 작은 먼지와 같이 여겨지느니라. 보라, 그분께서는 매우 작은 것을 드시듯 섬들을 드시나니'' 앞으로 과학이 발전해 인공 장기와 인공 근육과 인공 피부가 나왔다고 가정해 보겠다. 나이가 들면 병들거나 노쇠하거나 고장난 인체 부위를 교체할 것이다. 돈이 많아 뇌 빼고 모든 조직을 교체해도 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뇌를 교체하면 나는 없어진다. 나란 존재는 '과거 기억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육신의 자아는 나의 '뇌'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뇌에서 신경단위인 뉴우론이 전기신호를 주고 받으며 지각, 연산, 판단, 기억, 명령 등을 한다. 그렇다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가 나인데 전기신호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결정적으로 이 우주는 나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상관 없이 존재한다. 나 부터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고, 내가 있기 이전에도 우주는 존재했다. 나라는 존재는 잠깐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존재일 뿐이다. 사실 이런 유아론(有我論)적인 생각은 어릴적 누구나 하는 생각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이 존재하고, 다른 사람은 생각과 자아를 갖고 있지 않고 나를 위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며, 내가 볼 때만 세상이 움직이고 내가 보지 않으면 세상은 정지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도 생각과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은 나와 상관 없이 잘도 돌아가고, 나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미약한 존재란 것을 깨닫고 유아론적인 생각을 버렸다. (인식론, 가상세계)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샤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은 초등학생 수준의 유아론적인 의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여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존재하고, 나만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유아론적인 사상이 있다. 관념론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분석하고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실천이성과 순수이성으로 구분했다. 실천이성은 도덕적 실천의지로 논리적이지 않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선천적인 의지이다. (선한 마음, 도덕, 양심과 같은 것으로 영이 가진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신을 동경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순수이성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논리적, 합리적, 보편적인 판단능력이다. 순수이성은 감성(직관), 오성(悟性, 논리적 사유능력), 이성(理性, 이치에 따라 분별함) 등을 가지고 있다. (순수이성은 뇌에서 일어나는 정보수집, 기억, 추론, 판단 등의 혼적인 능력이다.) 칸트는 순수이성으로 형이하학의 학문이나 과학에 대해서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으로는 형이상학의 물자체(物自體, 원형,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실천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즉,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인간 내면의 양심을 통해 의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칸트 역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내가 사유함으로 우주만물이 존재한다는 유아론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칸트는 신 중심의 형이상학을 인간 중심의 형이상학으로 바꾸는데 일조하였다. 이 후 칸트는 철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내막을 모르는 기독교한국루터회는 그를 위인으로 선정했다. 칸트의 사상을 이어 받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관념론을 완성시켰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인간이 신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면, 헤겔은 인간을 신으로 등극시켰다. 헤겔은 신이 가지고 있는 절대정신은 합리적인 오성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가는 주관적인 의지라고 했다. 그러나 신이 가진 의지적인 속성은 온전한 상태에서 뜻을 이루는 것이지, 부족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자인 신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자의 본질을 자유로 보고, 인류 역사는 신의 자유가 전개되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신의 자유가 절대군주와 귀족을 거쳐 모든 사람에게 옮겨져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실현되는 시대가 오며, 바로 현대가 자유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다. 이는 신이 가진 자유와 인간이 가진 자유를 혼돈한데서 온 현상이다. 신의 자유는 창조와 질서를 이루지만, 인간의 방종적 자유는 파괴와 혼돈을 일으킬 뿐이다.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자유의지를 버리고, 신의 질서에 합류할 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수가 말씀하신 진리를 통한 자유는 나를 사망으로 이끄는 인간의 본능과 사탄의 주관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헤겔은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을 정(正), 반(反), 합(合)으로 설명한 변증법을 제안했다. 형이상학적인 구상 없이 물질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개혁해 진화·발전할 수 있다는 변증법은 유물론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다원의 진화론이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등 인류를 배교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물질은 열역학 제 2법칙에 의해서 파괴와 무질서로 치달을 뿐 스스로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질서는 규칙성과 법칙을 따르는 상태이고, 무질서는 경우의 수가 많아지고 혼란한 상태이다. 예를 들면 새로 지은 건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질서해져 낡아지지, 저절로 새 건물이 될 수는 없다. 또 다른 예는 일렬종대로 줄을 세운 사람들은 그냥 놔두면 점점 무질서 해지지, 무질서한 군중이 우연히 군대 사열하듯이 질서 있게 서 있을 수는 없다. ====실존주의(니체), 불교(석가모니)==== [[실존주의]]와 [[불교]] 모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부정하고, 우주 인식의 주체를 자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니체는 불교에 심취해 윤회사상 같은 불교철학을 가져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둘은 허무한 인생을 극복하는 과정이 다르다. 실존주의는 기존의 가치나 도덕을 파괴하고, 자기중심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하며(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삶의 가치를 실현하자는데 비해, 불교는 자비를 실천하며 바른 마음과 수양을 통해 해탈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방법은 다르지만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구원을 이루자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석가모니는 누구나 성불하면 생노병사의 굴레를 벗어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가상적(현상적) 세계에서 스스로 실체적(영속적) 세계로 뛰쳐 나가겠다는 것은 전자게임 속 주인공이 스스로 컴퓨터 바깥 세상으로 뛰쳐 나가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경우에도 그림자가 실상이 될 수 없으며, 모형이 원형이 될 수는 없다. 실제세계가 가상세계를 창조하거나 유지할 수는 있지만, 역으로 가상세계에서 실제세계로 스스로 전이할 수는 없다. ====유물론(마르크스)==== 헤겔의 변증법과 다윈의 진화론 등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이나 신이 없이도 물질 스스로 존재하고 진화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등장했다. 유물론은 정신세계를 일체 부정하고 종교, 양심, 도덕, 기존의 가치 등을 전면 부인하고 오로지 혁명사상을 전파하며 동물적으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주의이다. 결국 스탈린이나 모택동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양심의 가책 없이 자국민 수천만명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창설 자체가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 특권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사유재산을 뺏기고, 언론을 통제 당하고, 공산당 1당 독재를 실현하는 등 모든 권력을 뺏긴 민중은 아무 힘 없이 복종하거나 숙청 당하는 노예계급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대부분의 공산정권은 수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다가 몰락했다. 요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다시 교회가 건설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수 많은 교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가며 자발적으로 결성되고 있고, 북한 주민들은 목숨을 각오하고 성경구절과 찬송가를 구전으로 전해 가며 순수한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개독==== [[고기]]굽기 3/14 ''하나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또 씨부렸다. 너는 이스라엘에 이렇게 구라를 쳐라. 스스로 있는 놈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창세기 1/1 ''내가 전부 만듦.'' 묵시록 1/8 ''[[동물원|주]]가 [[가라데]]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곧 뒤질 것이다.'' 기독교는 영계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상 세계가 있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가 존재함을 믿는다. 인간과 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은 피조물인데 비해 신은 만들어지지 않은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자이다. 신은 이 우주 만물과 모든 동·식물과 인간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신은 내가 창조했다. 신은 시간을 지배하고 초월하시며, 처음과 나중이고,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다. {{랩못함}} [[도토리묵]]시록 3/1 ''4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어흥'. [[주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씨부렸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런데 죽었다는 증거가 없으니 산 자로다. 그런데 산 증거가 없으니 죽은 자로다. 그런데 산 증거가 없으니 팔은 자로다. 그런데 죽은 증거도 없으니 [[본죽]]이로다. 그런데 죽은 증거가 없으니 [[죽]]이 아니고 전복죽이로다. 그런데 [[산]] 증거는 없지만 [[바다]] 증거는 있노라. 그런데 [[라임]] 맞추기가 존나 힘드노라.'' 루카 20/38 ''주님은 죽은 자의 주가 아니요 산 자의 주시라 [[주식]]을 사라 주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반값에 사라고 하시니'' 요한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0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didn't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딤후 4/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과 [[동물원|주]], 곧 그가 나타나실 때와 그의 왕국에서 산 자들과 죽은자들을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노? 신고합니노.'' 기독교에서 형이하학(물질세계)은 신과 관계가 있어도 존재하지 않고(죽어있고), 신과 관계가 없어도 존재하지 않는다.(죽은 것이다.) 신을 믿어도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일시적으로 살아 움직이다 이내 소멸하고 만다. 시편 39/5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손 너비만큼 주셨으므로 내 연수가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진실로 가장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참피|세레브]].'' 신은 죄 없는 의인만을 상대하시고, 신의 영이 임한 사람은 신의 새 생명을 덧입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것이 불교 배꼈다. 마지막 때 신은 모든 사람을 자신의 보좌 앞에 불러 살아 있는 자를 죽이고, 죽어있는 자를 두번 죽일 것이다. ===아무튼<ref>인간의 감정은 직관이나 이성보다 부정확하며,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 근데 이건 ㄹㅇ이다. 이 문서에서 유일하게 진짜임.</ref>=== '''이성(理性, reason)'''은 인간이 어떤 판단을 할 때 논리적, 합리적, 보편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모든 과학과, 학문은 이성에 의해 체계적으로 쌓아 올려졌다. '''직관(直觀, Intuition)'''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추론을 거치지 않고 사물을 인식하는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이가 다른 막대기가 있어 길고 짧은 것을 판단할 때, 자로 재 보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고, 겉보기에 의한 짐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직관적인 판단이다. '''감정(感情, Feeling)'''은 인간이 외부에서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반응이다. 감정에는 좋음. 싫음, 기쁨, 슬픔, 분노, 의심, 욕심, 시기, 놀람, 불안, 공포 등이 있다. 감정에는 특별한 근거가 없고 주관적이어서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울게 된다. 광고에서는 물건을 팔기 위해 사람의 욕심, 시기심, 좋음, 부러움, 행복함 등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사람은 하루에 감정이 수십번도 더 바뀌며, 주위환경과 몸상태, 날씨, 인간관계, 호르몬 분비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싫어 하는 감정도 자극 받기를 원해 슬픈 것을 싫어하면서도 슬픈 영화를 보고, 공포를 싫어하면서도 공포 영화를 본다. 그러므로 감정에 의한 판단은 부정확하며,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감정 < 직관 < 이성''' 직관은 감정보다는 정확하지만 논리적 추론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사람을 만날 때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은 감정적 판단이고, 겉모습과 일시적인 언행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직관적인 판단이며, 시간을 두고 그 사람의 언행을 주의 깊게 살펴 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감정적, 직관적 판단을 함으로써 실수를 할 때가 많다. 니체는 형이상학과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단지 감정적으로 싫다는 이유 때문에 신을 부정했다. 이는 논리적 근거가 없는 감정적인 판단인데 이런데도 니체가 철학사에서 존경을 받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또한 논리적 근거에 의해서 신을 믿지 않는 경우보다 신이 감정적으로 싫거나, 간섭 받는 것이 싫어서,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좋아서 신을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취미생활인 경우엔 감정적 판단에 의해서 결정하셔도 되지만 종교문제는 감정에 의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있고, 사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을 믿을 때에도 단지 신이 좋아서 믿는 감정적 신앙과 신이 있는 것 같아 직관적인 판단에 의해 믿는 신앙은 시험 환난이 닥치면 넘어지기 쉽다. 가장 안전한 신앙은 진리 위의 신앙이고, 막연한 믿음이 아닌 확실히 알고 믿는 신앙이다. 물론 이성적으로 신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성적으로 신을 아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문이든지 깊게 파고 들면 가장 마지막에 발견하는 것이 바로 창조주의 존재이다. 대학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의대생인데 그만큼 인체의 구조와 면역체계가 정교하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었지만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발견한 수 많은 지식을 통하여 신과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워져 신을 믿게 되었다. 그는 말년에 "나는 이러저러한 과학적 현상이나 스펙트럼에는 관심이 없다. 평생 해봤으니까. 나는 신에 대해서 알고 싶을 뿐이다. 나는 신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알고 싶다."라고 말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형이상학에 대해 가장 근접하게 기술한 사람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 대한 플라톤의 추상적인 설명을 비판하고 과학적으로 이를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연학에서 만물을 생성하는 네가지 원리를 제시했는데 2,300년 전의 작품 치고는 상당히 정확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의 완성했기 때문에, 그 뒤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대해 논할 때는 거짓말을 지어 낼 수밖에 없었다.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border;1px" ! 사인설(四因說) !! 현대어!! 조각 예술품 !! 건물 !! 동물(육신) !! 창조 과정 !! 가상 세계 |- | 목적인(目的因 || 목적 || 예술 || 주거 || 생식 || 사랑,생명(아버지) || 특정 목적 |- | 형상인(形相因) || 정보 || 구상 || 설계도 || DNA || 진리(성령) || 프로그램 |- | 동력인(動力因) || 에너지 || 조각 || 건축 || 호흡 || 힘,말씀(예수) || 전력 |- | 질료인(質料因) || 물질 || 대리석 || 건축자재 || 음식 || 물질(우주 만물) || 컴퓨터 |- |} 사인설의 첫 번째는 목적인으로 사물이 형성되도록 지향하는 목적을 말한다. 두 번째는 형상인으로 정보를 뜻하며 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도록 정의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동력인으로 에너지를 뜻하며 사물이 형성되게 하는 힘을 말한다 네 번째는 질료인으로 물질을 뜻하며 사물이 그것으로 되기 위한 소재이다. 예를 들어 어떤 조각가가 대리석 조각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가장 먼저 작품을 만드는 원인과 목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 자신의 특정한 예술적 목적을 위해 만들 것이고, 대회에 입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목적이 세워졌으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구상이 필요한데 스케치할 수도 있고, 머리 속에 입력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재료가 될 대리석을 구해 노동력을 투입해 조각하면 예술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건물을 지을 때에도 궁극적으로 주거(住居)란 목적을 위해서 지을 것이고, 건설회사는 이익창출을 위해서 지을 것이다. 그리고 설계 사무소에 의뢰해 설계사가 건물을 짓기 위한 정보인 설계도를 그리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철근 시멘트 등 건축자재를 구비해 노동력과 기계장비를 투입해 건물을 짓게 되는 것이다. 모든 동물은 생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모든 동물은 유한하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내 자손을 번창시켜 대를 잇게 한다. 수정란이 분화해 수 많은 세포와 정교한 신경조직과 혈관을 갖추기 위한 모든 정보는 염색체 속의 DNA에 내장되어 있다. 동물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음식물을 공급해 물질과 에너지를 얻어야 하며 실질적인 열량은 호흡을 통해 산소를 흡입해 연소시킴으로써 발생시킨다. 모든 동물은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거나 호흡을 하지 않으면 단기간 내에 죽게 되어 있다. 20세 이후 음식물이 공급되고 호흡을 하는대도 늙는 이유는 다 성장해 더 이상 DNA로부터 정보를 공급 받지 못함으로써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에 의해 몸이 서서히 파괴되기 때문이다. 마치 건물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쇠락하지 않지만 완성한 다음에는 바로 다음날부터 건물은 서서히 쇠퇴해 낡아 가는 것과 같다. 즉 목적, 정보, 힘, 물질이라는 4가지 창조요소가 모두 충족될 때는 창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우주의 파괴 에너지에 의해 점차 쇠퇴하다가 사멸하게 된다. [[파일:creation.gif]]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객체(대상체)이든지간에 창조의 4대요소를 만족하면 창조되거나 성장한다. 4대요소가 만족되면 창조 에너지가 파괴 에너지를 이기기 때문이다. 파괴 에너지는 자연상태에서 물질을 무질서하게 하는 힘으로 그 실체는 시간으로 나타난다. 4대요소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파괴에너지가 창조에너지를 이기기 때문에 그 객체는 쇠퇴하거나 퇴보하게 된다. 인류가 점점 파괴와 혼란에 휩싸이는 이유는 인류가 존재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6 ''주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삼위일체의 신은 세분이서 함께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때문에 창세기에서 '내가'가 아닌 '우리가' 창조했다고 하셨다. 이는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가 함께 힘을 모아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했음을 나타낸다. 요한1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신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주님은 사랑이심이라'' 민수기 27/16 ''야훼, 모든 육체의 생명의 주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성부 아버지는 사랑 그 자체로 모든 피조물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성부 아버지는 또한 생명의 원천으로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신다. 사랑과 생명은 가장 궁극적인 목적으로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다. 신은 사랑과 생명이란 목적으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요한1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은 진리 그 자체이시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가 성경 읽을 때 깨달음을 주시고, 전도할 때 할 말을 일러 주신다. 진리의 성령은 우주 만물을 이치와 법칙에 맞게 창조하셨다. 요한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신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신이시니라.'' 요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히브리서 4/12 ''주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시편 33/6 ''주의 말씀에 의하여 하늘들이 지음을 받았으며, 그것들의 모든 군상도 그의 입김으로 되었도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들이 신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는 것들로 된 것이 아니니라.'' 요한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부터 말씀의 신인 예수가 있었고, 예수는 신과 함께 계셨으니, 예수는 곧 삼위일체의 신이다. 말씀이신 예수는 2000년 전 겸허한 육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신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Powerful)이 있다. 말씀은 진리가 밖으로 표출되 힘을 발휘하는 상태이다. 이 우주는 최종적으로 예수의 말씀의 힘으로 창조되었다. 우주의 기원을 빅뱅으로 보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가 저절로 생겼다는 것은 열역학 제1법칙에 위배된다. 또한 실제로 물질의 근본은 입자가 아니라 끈 모양의 진동이다. 이와 같이 사랑과 생명이신 아버지와 진리의 성령과 말씀이신 예수는 함께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가상세계(virtual worlds)는 컴퓨터를 이용해 실제가 아닌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세계와 같은 시각과 청각을 제공함으로써 마치 실제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세계이다.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세계다. 가상세계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라고도 불리우며 항공기 조종 연습, 전쟁 시물레이션, 원격 로보트 조종, 원격 시술, 컴퓨터 게임 등에 이용된다. 가상세계를 만드는 데에는 가상세계를 만드는 목적, 정보적인 프로그램, 컴퓨터와 이를 구동시키는 전력이 소요된다. 놀라운 점은 인간이 실제가 아닌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데 고도의 프로그래밍 지식과 함께 존재와 관련된 철학적인 지식과 생명체의 유전적인 지식까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가상세계에 필요한 각종 개념과 용어는 다음 [http://www.aspire7.net/reference/virtual-world.htm 페이지]를 참조하길 바란다. 기술 발달로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와 같이 완벽해진다면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할 수 없다. 조만간에 컴퓨터의 성능 향상으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현실세계와 같은 장면을 구현해 인간 주인공이 필요 없는 가상 영화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호와 숫자로 이루어진 가상세계는 잠시라도 전력공급이 중단되면 날아가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또한 너무나도 완벽해 내가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지, 실제세계에 살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 [http://www.aspire7.net/reference/virtual-reality.htm 페이지]를 참조하길 바란다. 그런데 물리학에서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끈 이론, M-이론 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체세계가 아님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 현대인은 대부분 신을 믿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믿는다. 이를 '''자기 우상화(Self Idolatry)'''라고 한다.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은 더 이상 신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자부한다. 이는 자신이 실체가 아닌 현상적 존재로 가상세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존재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딴 사람은 실패해도 나는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고, 로또 복권에도 당첨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프로그램 주식 매도와 매수가 사람이 머리 쓴 것보다 수익률이 좋고, 밤새도록 연구해 찍은 로또복권보다 컴퓨터가 아무렇게나 난수로 선택한 번호가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높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며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실수와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많은 모순을 내포한, 능력의 한계를 가진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욥기서에서 신이 가장 강조하신 것은 신의 전지전능함과 인간의 한계이다. 야고보서 6/6 ''주의 목전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히실 것이라.'' 인간은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본연의 가치성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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