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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중기 == 청나라가 붕괴되고 그 공백을 차지한 위안스카이가 희대의 자폭쇼를 거행한 뒤 중국 대륙 곳곳에서 세금 안내겠다는 불체자부터 시작해서 뭐 해보겠다고 나대는 야심가 거기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주판이나 쪼물딱대는 병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붕괴하자 장부에 미기록된 암거래부터 별의별 좆같은 게 성횡해서 공식 통계에는 안잡히는 지하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다. 그리고 깡패나 조폭(삼합회) 등 별에 별 잡것들도 수두룩하게 생겼다. 일단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국민당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대륙 확보에는 군벌이나 애초에 관리할 관료 부족 등 여러 문제가 겹쳐서 인구 400만 벨기에한테도 공업 생산력이 발렸다. 덤으로 세금의 90%는 빚갚고 군대 유지하는데 쓰이는 병신같은 상황이었다. 공산당은 중국 장시성에서 코뮨인가 뭔가하는거 세웠다. 근데 당시 지도층이 걍 간잽이, 헛똑똑이들 수준인 주제에 설쳐대다가 국민당한테 좆쳐맞고 저 멀리 산시성으로 빤쓰런하는데 이걸 대장정이라고 미화한다. 참고로 대장정해서 옌안초기까지(물론 시중쉰을 비롯한 빨갱이들은 이를 당내 극좌세력과의 투쟁이라고 미화했다) 소련유학파나 친소파를 쩌둥이가 신나게 숙청해댄 바람에 소련하고 사이가 매우 안 좋아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1928년에 봉천군벌(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집단)의 수장인 장쭤린 폭사시키고, 1931년에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따먹어 이것저것 구실로 삼아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기오로 푸이(애신각라 부의)를 데려다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설립하였다. 국민당은 일단 내부 정리가 먼저라 1932년에 상하이 협정 맺고 공산당이나 좆소군벌들 패죽이러 갔다. 한편 산시성으로 빤쓰런한 공산당은 당시만해도 카리스마있고, 빡대가리라 전략은 모르지만 전술은 꽤 하던 마오쩌둥의 지도하에 점점 세를 불려갔는데 암울한건 마찬가지였고, 국민당이 제대로 토벌에 나서면 순식간에 뒈짖할 운명이었다. 마찬가지로 장제스와 국민당은 본격적으로 공산당을 끝내버리고 군벌들도 싸그리 정리한 다음에 천천히 힘을 길러서 만주 탈환을 한다는 빅픽쳐를 그려갔다. 그리고 나름대로 먹혀서 경제도 살아나고 군대도 점점 구색을 갖춰져갔는데 봉천군벌의 수장이자 폭사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장학량)이 본인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자 '공비 토벌은 나중에 하고 항일이 먼저!'라는 멋들어진 대의명분으로 장제스를 납치, 감금 및 협박한다. 그리고 이리저리해서 장제스(국민당)랑 모택동(공산당)이 힘을 합쳐서 일본에 맞섭시다 해서 2차 국공합작이 맺어졌다. 중국사람들은 와! 항일! 와! 국공합작! 이랬다. 근데 사실 장쉐량은 항일이고 뭐고 걍 지 나와바리였던 만주 되찾아달라고 그지랄 한거고 이 덕분에 공산당은 전멸 직전에서 기사회생했다. 이때 일본 빡대가리 장성들은 짱깨 같은 좆밥은 1년안에 털어버릴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며 덴노랑 정부 상대로 구라를 깠다. 이때 일본 내의 상식인들과 서구 문물과 정보에 능한 이들은 그게 뭔 개소리냐는 반응이었지만 (장쉐량 병신덕이지만) 만주 전역에서 짱깨군 개학살 하고 존나 쉽게 먹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결국 짱깨를 쳐죽이자로 의견이 모인다. 그러다 1937년 7월노구교 사건이 터지고(어떤 일본인 병사 하나가 순찰인가 하다가 실종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똥 싸다 늦음) 이로인해 국경간 국지전이 벌어지고 그게 점점 더 확대되면서(당시 일본 군부가 의도한대로) 처음인 베이핑 인근의 다리에서 시작된 전투가 일대를 둘러싼 전역으로 변하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개전 극초기인 베이핑 전역에서 덜 훈련받은 중국군이 거듭 참패를 당하고 일본군이 화북으로 진입해 그대로 중원을 정복한다. 그리고 일본은 "자 그럼 이제 화평 맺자"고 했다. 원래 31년의 만주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한번에 꿀꺽하는건 힘들어보이니까 일단 화북의 성 몇개 받아다가 괴뢰국 세우고 개꿀 할 생각이었다. 물론 나중에 다시 털어먹겠다는 야망은 감추지도 않은채로. 헌데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장제스는 협상 따윈 없다고 난징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근데 사실 이때 즈음에 반 장제스파나 온건파가 걍 평협하자고 존나 극딜하던 때였다) 내친김에 8월에 상하이 시가지에 ㅈ만하게 있는 일본 해군특별육전대 2500명(후에 5000명으로 증강)이 주둔한 일본 조계지를 치기로 결정한다. 장제스는 일본군이 증원을 보내기 전 빠르게 일본 조계지를 정리하고 병력들 빼서 해안방어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독일식 직계군 5만명을 빼서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 직계군 마저도 중장비나 기갑부대 다루는 숙련도가 병신이라 결국 못 밀고 일본군의 증원을 허용한다. 그 이후 일본군에 맞서 상하이를 사수하기 위해 여기서 지난 몇년간 장제스가 아끼고 아껴놨던 독일식 훈련을 받은 직계군이 싸그리 투입되면서 상하이와 난징 그 근교를 둘러싼 애미없는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그동안 투닥거렸던 군벌군과는 클라스가 다른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꽤나 선전하며 개겼다. 하지만 장제스는 좆본군의 우회 가능성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고 결국 11월이 일본군이 상하이 옆의 항저우에 상륙해 장제스 직계군이 포위섬멸당해서 결국 상하이는 함락된다. 허베이에서도 전쟁 시작하고 이틀만에 최전선에 있던 대도시인 베이핑, 톈진이 털리고 이를 되찾기 위한 탕언보, 웨이리황 부대의 반격도 격퇴되면서 털리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주 공격로는 당시 중국의 핵심 철로 중 하나였던 핑한 철로(베이핑-우한을 잇는 철로)였는데, 중국군도 애저녁에 이를 예측해 철로가 지나는 선상에 토치카를 깔아놨지만 결국 바오딩, 스자좡 등이 뚫렸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는 이타가키 세이시로라는 놈(이 놈은 [[만주사변]]의 발발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이 상부의 명령을 씹고 전공 세워보겠다고 멋대로 공격로에서 이탈해 산시성을 쳤다. 산시성은 당시 산시의 토황제라고 불리었던 바로 그 [[옌시산]]이 지키고 있었고, 옌시산은 팔로군과 협력해 평형관에서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는가 하면 성도인 타이위안 바로 북쪽인 신커우전이라는 곳에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해 거기서 일본군을 1달 넘게 저지했다. 결국 빡친 일본군은 한참 떨어진 스자좡을 공격하는 부대에서 2개 사단을 빼서 산시성을 측면에서 치기로 한다. 장제스도 이를 막으려도 인근의 산둥성장 한푸쥐를 보내지만 한푸쥐는 장제스의 명령을 아예 씹고 튀어버리는 지대한 트롤짓을 저질렀고, 한푸쥐의 빤쓰런으로 인해 일본군은 타이위안 동쪽의 거점인 낭자관에 별 피해 없이 입성한다. 결국 측면이 털린 옌시산은 그때까지도 잘 막고 있던 신커우전 방어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타이위안은 북쪽과 동쪽에서 협공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결국 옌시산은 11월 초 타이위안을 포기하고 린펀이라는 산시성 남부의 산악지대로 튀었다. 11월 12일 일본군은 타이위안을 점령했고 내년인 1938년 3월 6일에는 린펀까지 점령한다. 옌시산은 한 번 더 도망간 다음에 일본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과 큰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옆동네 옌안에서부터 세력을 키우던 팔로군이 옌시산의 영역을 침범하자 걔네랑 더 많이 싸웠다. 상하이 전역에서만 와해된 국민당 전력이 80만이고 전사자만 25만이다. 다만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30만명중 5만명이 뒤졌다. 시간상으로 이전에 일어났던 허베이 전역에서의 피해는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이제 앞으로 나오는 숫자들을 보며 대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보자. 상하이 전역 종료 후 난징으로 가는 길은 뻥 뚫렸고 국민당은 남은 전력인 20만의 수비대를 배치하고 난징 공방전을 벌였지만 수비대장 탕성즈의 빤쓰런과 아낌없는 독가스 뿌리기로 방어선이 무너지며 난징은 생각보다 쉽게 점령당한다. 이렇게 난징, 상하이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16세기 한성 레이드 이후로 처음 맞이한 적국 본진털기의 기쁨과 감히 자신들에게 저항하고 좆되게한 국민당과 중국에 대한 분노로 대규모 학살을 벌이는데 그게 바로 [[난징 대학살]]이다. 나름대로 병사 스트레스 해소 및 겁주기 용도였는데 정작 장제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와" 국민정부'에서 '장제스=국민정부' 수준의 절대적 권위의 영도자로 등극한다. 이에 일본은 쉬저우, 우한, 광저우까지 함락시키면 장제스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항복 안했고 여튼 그 뒤론 걍 씨발 인민의 파도가 몰려왔다. 보급도 안좋고, 현지 분위기도 나쁘고, 앞에서는 창, 칼, 총 무기로 쓸만한건 죄다 꼬불고 미친 파도처럼 사람이 밀려들고 "갸아아악 구와아악" 하니까 일본도 이쯤되면 어 씨벌 이게 아닌데... 하는 분위기였다. 쉬저우에서는 내전기간 중 장제스 병력도 관광시켜주며 날뛰던 계계군벌 리쭝런 휘하의 제5전구군 35만명이 처음으로 야전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포위섬멸을 시도하며 탈탈 털어먹었고 이에 고무된 중앙에서 지원군을 보내 쉬저우 일대에서만 60만의 중국군이 진을 친 가운데 이걸 잡겠다고 벌떼같이 20만의 일본군이 몰려들어서 도합 80만이 쉬저우로 몰려들었다. 정작 5전구군은 포위섬멸을 우려하여 퇴각을 한 관계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애꿎은 쉬저우에서 또 강간, 학살이 일어났다. 또 허베이의 평형관에선 팔로군이 산시 군벌 옌시산과 손을 잡고 연대급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본격적인 판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다만 후에 밝혀진것에 따르면 이는 팔로군의 과장으로 실제 일본군 사상자는 30명밖에 안됐다고 한다. 어쨋건 일본군을 잠시 막긴 막았으니 뭐... 끝없는 초기 중국의 물량전설은 우한 전역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상해 전역에서 25만이 사망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00만의 중국군이 임시수도로 선포된 우한의 수비를 위해 집결했다. 전술한 리쭝런의 5전구군은 우한 북쪽의 다볘산맥에 방어선을 치고 우주방어를 시작했고 나머지 군대가 장강을 끼고 똑같이 방어전에 돌입했다. 이에 일본군도 40만을 우한전역에 집결하여 공세를 가했지만 이 엄청난 방어선은 뚫리지 않았고 6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상황을 타진하려고 독가스를 썼다(국제법상 금지되어 있음. 나치 독일도 소련이랑 싸울 때 안 쓴 것). 나치도 빨치산 등등을 사냥할 때는 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군이 비정규전도 아닌 정규전에 쓴 게 덮어지지는 않는다. 낙지도 쉬쉬하고 쓴 걸 쟤들은 대놓고 썼으니까 제재 처먹는 게 당연하다. 한편 공산당은 이렇게 둘이 몸비틀고 환상의 똥꼬쇼!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할 때 양 쪽 후방 돌아댕기면서 사보타주하고 테러하고 선동질하고 아주 그냥 좆같이 하고 다녔다. 이게 존나 웃긴 게 일본군이 국민당을 조지면 갑자기 공산당이 와서 낼름 집어삼키고 적당히 일본군 뒤통수 치고 도망갔다. 그래서 일본은 장제스에게 공비 먼저 조지고 일단 화해하자는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러면서도 몸은 솔직하게 점령지 굳히기에 들어가서 좆까는 소리 말라는 말만 듣는다. 이러자 돈은 돈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날리면서 좆같이 넓은 이 땅에다가 낭비만 좆되게 했다는 일본은 오기로라도 먹겠다며 국가 총동원법을 때리고 강제 징용까지 한다. 이때가 개전 1년이 되기 전 1938년 4월 즈음이었다. 현재까지 상황을 정리하자면 그 드넓은 중국을 반쯤 삼키기는 했는데 나머지 반이 목구멍으로 좀처럼 넘어가주지 않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배급도 나날이 좆같아지고 수혜를 보는건 정계와 유착한 일부 재벌뿐인 좆같은 상황을 목도한 일본인들은 헬일본! 탈일본 한다 쒸벌! 하면서 식민지로 튀거나 아님 유럽이나 미국 갔다. 이렇게 병역회피가 만연해지면서 도저히 일본인 만으로는 군인 수요를 못채우니까 한국인들도 강제징용하고 일본어 강요, 신사 참배 강요 등 악질적인 문화 말살행위를 자행한다. 나중에 태평양 후기에는 대만에도 문화 말살작업 시작하고 순혈주의가 심하던 해군조차도 식민지인을 받아들였다. 참고로 이건 43년도 즈음 이야기다. 전쟁 초기에도 식민지 자원은 입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점차 지원병에서 징병제로 변했다. 그래도 어쨋건 꾸준히 진격을 거듭하여 1938년 우한이 털리고 국민당은 충칭으로 또 한번 수도를 옮기며 빤쓰런 했고 이제 충칭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격전지로 변했다. 우한 함락과 비슷한 시기에 남부 해안가 최대 항구인 광저우까지 함락당하면서 무기수입에 차질이 생겼고 장제스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난닝에서 지금의 하노이인 통킹으로 이어지는 수입루트를 개설했다. 일본은 이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하이난을 점령하고 난닝까지 점령하여 수입로를 차단했고 장제스는 이번엔 쿤밍에서 버마까지 이어지는 버마로드를 뚫어 무기를 수입했다. 이제 일본군의 시선은 원활한 보급로 확보를 위해 우한 남쪽의 창사로 향했고 창사는 44년 까지 무려 4번의 공방전 끝에야 겨우 일본에게 함락당한다. 이제 명백히 총력전 상황에 돌입한 것을 직감한 쪽본은 충칭에 처음으로 민간인 통궈쇼를 선사해보이면서 이게 총력전이니 너희들도 할 수 있다면 나중에 똑같이 우리에게 하려무나.라는 가르침을 세계에 전파했다. 과연 그로부터 6년이 지나 쪽본의 후계를 잇는 아서 해리스와 커티스 르메이라는 제자들이 나타나 가르침을 실천하고 청출어람 정신으로 스승마저 구워버렸다. 1939년 말까지 충칭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에 위치한 도시에서 공세와 방어, 반격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국민당군은 점점 경험치를 쌓고 진화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9월이 되면서 2차세계대전이 터졌고 장제스는 이제 때가 왔다고 판단. 중국 전선도 명백한 전선으로 인식될 수 있게끔 또다시 100만을 모아 동계대공세를 실시했다. 이 공세에서 장제스는 난닝 탈환을 시도했고 일본 수비군을 뒤지기 직전까지 몰아가 결국 일본 사령부에서 난닝을 포기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수비군에 내렸으나 그 수비군 대장이 명령을 씹고(...) 장판파마냥 오지게 존버해서 결국 중국군이 물러났다. 일본군 종특인 명령 불복이 도움이 된 몇 안되는 사례. 이 외에도 화북에서 공세를 가해 카이펑을 탈환했으며 쪽본 괴뢰인 몽강자치연합정부와도 접전을 벌여 선전하기도 했다. 이 공세는 2차 대전에서 연합군으로서 존재감을 늘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공세였던만큼 다소 엉성한 작전능력이 관찰됐으며 결국 좆본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한다는 야심찬 계획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편 지난 20년 동안 애증의 관계였던 장제스의 경쟁자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등 몇몇 따까리들과 일본과의 타협을 주장하며 난징으로 튀었고 옳다구나한 일본은 그를 수장으로 하는 난징 국민정부를 세웠으나 중국인들은 여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되려 국민당의 청방, 남의사, СС단이 난징정부애 속한 요인들을 암살하며 공포감만 조성시켰다. 일본은 일본대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 극동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고 결국 몽골과의 국경선인 할힌골에서 소련군과 국지전에 돌입했으나 무참히 깨지고 패배한다. 1940년으로 가서 독일이 유럽에서 깽판치자 일본은 감명받아 독일과 동맹을 체결한다. 그리고 중국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비시 프랑스한테 헛소리하며 동남아 식민지를 삥뜯었다. 한편 미국은 중일전쟁때부터 영국과 편먹고 작작해라 섬숭이 새끼들아 하면서 제재를 걸기 시작했는데 나치랑 뜬금포로 편먹기 하니까 제재했다. 일본은 당시 자원이고 뭐고 좆도 없었고, 특히 석유를 미국에서 좆되게 수입하던 상황이라 '아이구 충성충성 왜그럼?' 했는데 미국은 '좆까고 중국에서 물러나'를 비롯한 몇가지 조건을 내걸음. 차피 중국 먹어서 좋을것도 없고 걍 물러나면 되는걸 자존심 때문에 우끼끼 풀발기한 일본은 난동 피우고 결국 협상은 나가리되었다. 이후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소련에 접근해 일소중립조약을 맺고 'ㅎㅎ 중국 고립 씹오지는 각'이라며 자화지찬했는데 물론 좆까고 지원은 그대로였다. 좀 더 암암리에 시행되고 양이 줄었을 뿐이지. 그러면서도 소련에대한 일종의 공포감(할힌골 전에도 1938년에 두만강에서 한번 싸웠다)과 뭔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관동군 창설해서 소련 밀리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까 했다. 한편 독소전이 한창 진행중일 때 미국은 슬슬 시동 걸어볼까 하면서 전쟁준비 하도 그러면서 일본 좆되보라고 제재를 잔뜩 강화했다. 그러자 일본은 중국 밀다가 뜬금포로 동남아 침공에 병력을 차출해내는데 당시 동남아에 있던 영국군은 잘 쳐줘봐야 2군 3군 수준의 방위군 정도여서 그래도 정규군인 일본이 다 발랐다. 그리고 점령지 사람들한테 '대동아연방'이라며 동아 민족이 힘을 모아다가 귀축 영미, 제국주의자들을 조져야한다고 선동했다. 몇몇 지식인들은 혹해가지고 협력했는데 얼마 안가서 학살, 착취해대니까 거의 다 좆까라고하고 반일 저항했고, 한편 시암 왕국(태국) 하고는 나름 사이가 좋아서 군부 쿠데타 지지해주고 씹지랄 하면서 동맹(속국)으로 편입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태국 이 새끼들이 ㄹㅇ 기회주의랄까 외교력이랄까 개쩌는게 초창기에 일본이 영국 동양함대 개처바르며 동남아를 석권할때는 훈도시를 핥아대더니 나중에 미드웨이 이후 일본이 미국한테 털리기 시작할때는 또 연합군 편으로 갔다. 전후 영국이 이 새끼들 박쥐라며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이 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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