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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의 관점 === {{인용문|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그 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정욕의 여러 가지 억제를 외부로 나오지 않게 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제3조}} {{인용문|누구든지 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회개했다고 해서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죄 하나하나에 대해서 일일이 회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시 19:13, 눅 19:8, 딤전 1:13, 15). 각자는 죄의 용서를 얻도록 기도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사적으로 고백을 해야 한다(시 51:45, 7, 9, 14, 32:56). 그렇게 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게 되며 또한 죄를 버림으로써 자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잠 28:13, 요일 1:9). 그러므로 '''형제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걸림돌이 된 사람은 사적으로든지 공적으로든지 자기의 죄에 대하여 고백하고 슬퍼함으로써 상처를 입은 자에게 자기의 회개를 표하도록 해야 한다'''(약 5:16, 눅 17:34, 수 7:19, 시 51편 전체). 상처를 입은 사람은 이 회개를 통하여 화목케 되고 그를 사랑으로써 용납해 주어야 한다(고후 2:8, 갈 6:12).|[[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5장 <ref>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홈페이지에서 발췌[[http://kapc.org/law_2]]</ref>}} 이번에는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를 두고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식 구원론을 한국 근본주의 개독들이 함부로 남용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남용도 남용이지만 구원론에 대한 자의적 왜곡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예수천국 불신지옥]] 교리와 엮어서 비판하기도 하는데, 효과적인 비판을 위해서는 기독론보다는 구원론의 측면에서 접근함이 적절하다. 어쨌든 개신교의 입장에서 얼핏 보기에는 마치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을 뿐, 솔직히 옳은 말이지 않은가" 식의 반응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죄는 씻을 수 있다는 이 헛소리에 담겨 있는 구원론은 '''근본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잡탕식 구원론'''이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일례로 [[침례교]] 신학자인 신광은은 [[한국의 개신교]]에 만연한 구원론을 분석한 바 있는데 <ref>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2014. 단 이 사례를 분석한 저술은 아니다. </ref>이것은 위의 망언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에 따르면, 개신교 구원론의 두 축을 이루는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부적절한 야합'''이 문제라는 것이다. 참고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아직까지도 상충관계에 있으며 두 교리 사이의 충돌은 현재진행형이다. * '''알미니안주의'''<ref>[[신학/개신교|개신교 신학]]에서, 구원에 있어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중시하는 학설. ~~[[감리교]], [[성결교]]와 [[성공회]] 일부가 이쪽이다.~~ 현재 개신교 신학 양대 축 중 하나인 웨슬리안 계통의 교파들의 신학은 아르미니우스파 신학과는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웨슬리의 선재은총론과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다. 실제로 알미니안주의는 개신교 교파들 내에서 매우 극소수이다. 현재 개신교 교파들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루터의 [[이신칭의]]론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해석을 다르게 하는 것인데 아르미니우스파는 애초에 이신칭의 자체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ref>:내가 내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도중에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 '''[[장 칼뱅|칼뱅주의]]'''<ref> 개신교 신학에서, 구원에 있어 절대자의 주권적 권한을 중시하는 학설. 장로교와 성공회 일부가 이쪽이다.</ref>: [[야훼|신]]은 나의 구원을 끝까지 결코 취소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나를 구원하지 않았을 위험이 있다. 여기서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 두 교파의 교리에서 신자들이 듣기 좋고 입맛에 딱 맞는 부분만 이렇게 쏙쏙 끄집어내어, 그 둘을 한데 합쳐 버림으로써, 편의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교리라기보다는 비즈니스에 가까운 마케팅용 잡탕을 만들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즉, 제대로 된 알미니안주의자는 범인 이씨의 죄에 대하여 '''구원의 상실'''을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며, 제대로 된 칼뱅주의자는 범인 이씨의 죄에 대하여 '''주권적 유기'''를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칼뱅주의자는 타인의 선택유기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행실 속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게 된다고 추정한다. 즉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죄를 진심으로 애통해하고 그 죄로 인해 고통받게 될 것인데 이 행동은 그렇지 않으니 '당신은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라고 경고한다는 뜻이다. 단, 현재 이 문서에서는 알미니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양대 축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따졌을 때 좀 어폐가 있다. 현대 개신교 교파들 창시의 기본 토대가 되는 루터의 [[이신칭의]]론은 대다수의 교파가 신앙의 근본으로 고백하는데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은 이 이신칭의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아르미니우스파는 개신교에서 매우 극소수이다. 알미니안주의보다는 웨슬리안주의가 칼뱅주의에 대응하는 양대 축으로 더 알맞다.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에 영향을 일정 부분 받긴 했으나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웨슬리는 하느님의 선재은총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의 성화를 논했을 뿐이고 그 역시 기본적으로 루터의 이신칭의론은 베이스로 깔고 들어갔다. 그는 그저 칼뱅파 일부의 극단적인 이중예정설에 반기를 들고, 인간이 성화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지 이신칭의에 위배되는 구원의 취소 같은 것을 주장한 적이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교회 내에서의 신앙 활동(성사 등), 선행 등을 통해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된다는 의화교리를 갖고 있는 그 [[가톨릭]] 조차도 신인협력이나 구원의 취소를 그렇게 쉽게 논하지는 않는다.<ref>가톨릭 교리상으로는 대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통한 회개의 과정이 없다면 하느님 은총으로 받은 의를 상실하여 구원이 취소될 수 있기는 하다. 이 부분이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개신교 측에는 행위구원론으로 비판받는 부분이다. </ref>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 역시도 구원을 논할 때 1순위가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구원관은 웨슬리안과 알미니안의 사이에 있다고 보면 된다. ~~확실한 건 정교회, 가톨릭, 칼뱅주의, 웨슬리안, 알미니안 등 어느 관점에서도 [[펠라기우스]] 이 놈의 자력구원설은 개소리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개신교인이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나올 게 아니라 "제가 [[야훼|하늘]]과 [[사회|땅]]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정도의 고백이 나왔어야 하지만, 그렇게 개념이 박힌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짓거리를 했을지는... 어쨌든, 어느 쪽 교리를 근거로 하든 저 자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오히려 엄격한 개신교 교리에 입각하면 저 발언으로 오히려 죄를 더 쌓았을 가능성이 한없이 높다. 만일 종교재판이 있던 시절이었으면 신성모독과 [[이단]]으로 즉시 엄중한 처벌이 나왔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개신교나 여느 기독교 교파의 관점에서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이다. 범인이 자살을 하지 못한 것은 [[십계명]] 중의 '살인하지 말라'를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자신을 '살인'하는 것이므로)<ref>하지만 대다수의 소심한 사람들처럼 실행할 용기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ref>하지만 범인은 자신의 자식들을 살해하였다. 기독교 교리상 아이들은 돌보아야 할 존재들, 즉 지켜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피의자는 자기 자식들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도박, 빚, 갈취 등 범행을 하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에 철저히 금지되는 짓들을 저질렀다. 최종적으로 단결짓자면, 여느 보통 개신교인이나 기독교 교파에 소속된 신앙인들이 하지 않을 짓을 저지른 것이다. 범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교리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다. 그는 아마도 교회에 나가기만 하는 신자였을 것이고,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했다. 이리하여 저속한 교리에 대한 지식, 낮은 이해도, 그리고 오직 자살만은 안 했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은 그를 좋은 결과로 이끌지 않았으며, 구원마저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신자라고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 즉 살인을 포함한 모든 죄를 저지르지 않고 예수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를 아이들을 귀중하고 소중히 여겼다. 예수는 누구든지 어린이 한명이라도 죄를 짓게 하거나 불행하게 한다면 차라리 맷돌을 발에 걸어 바다의 빠지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범인이 살인을 저질렀어도 그저 자살만 안 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 교리를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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