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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차 북벌 및 죽음 ==== [[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수 남쪽에서 대치했다. 이후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사마의가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다리를 만들자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했다. 한편 제갈량은 우회기동으로 위군의 허를 찔렀으나 [[곽회]]의 기지로 인해 저지되었다. 이후 사마의가 교전에 응하지 않고 굳게 지키니 전장은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오장원에서 촉군은 수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위군이 교전에 응하지 않으니 촉군은 오장원에 눌러 앉는다. 평소 제갈량은 늘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오장원에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로서 제갈량은 위수 남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촉군의 둔전이 시작되고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위나라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제갈량은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를 보내 도발하였는데 사마의가 분노하여 싸우기 위해 명제 조예에게 청하니 조예는 신비에게 부절을 딸려보내면서 싸우는 것을 막았다. 이에 강유가 저들이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라 탄식하니 제갈량은 '본디 사마의는 싸울 마음이 없고 단지 황제의 지지를 받아 장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라 평했다. 한편 사마의는 제갈량이 식소사번<ref>食小事煩, 즉 식사는 적게하고 일은 과중하다는 의미로서 당시 평균수명을 따져보아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 늙은 제갈량이 과로하여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f> 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제갈량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여겨 수비를 굳건히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9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이를 후세에 [[추풍오장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이를 추격하다가 퇴각을 맡던 [[강유]]가 군을 돌려 공격할 태세<ref>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외모를 본딴 나무인형을 평소 제갈량이 타고 다니던 수레에 태우고 진군시켜 사마의를 놀래키는 장면이 나온다.</ref> 를 취하니 황급히 후퇴하는데<ref>정사의 기록으론 제갈량 사후 촉군이 군을 정돈하고 퇴각하자 사람들이 사마의에게 급히 알려 사마의가 바로 추격했는데 촉군을 이끌던 강유와 양의가 북을 울리고 마치 공격할 것처럼 대응하자 추격하던 사마의가 군사를 바로 물리고 감히 촉군을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에 촉군이 죄다 후퇴한 뒤에야 후퇴한 촉군의 영채를 살펴보았다고 나온다.</ref> 이런 모습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좆았다는 의미로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된다. 이후 사마의는 후퇴한 촉군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이후 사마의는 촉군의 영채에서 많은 책서와 양곡을 노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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