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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 걍 쉽게 말해서 고려 공산당이라는 공산당 단체끼리 권력다툼하다가 적군을 끌어들여서 비공산주의자들까지 학살당한 사건이다. 결국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의 책임으로 두 달 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되돌아 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지만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이 지청천의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삼아 체포되었다. 다행히도 7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고려공산당에서도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계속 심해졌고 결국 코민테른이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월 극동총국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모조리 단합시켰다.<ref>{{웹 인용 |제목=고려공산당 |url=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EA%B3%B5%EC%82%B0%EB%8B%B9 |웹사이트=kr.wikipedia |출판사=wikipedia |확인날짜=2020-03-25 |인용문=양파의 파쟁이 극심해짐에 따라 코민테른은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1922년 12월 양파를 모두 해체시킨 후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게 했다.}}</ref> 이때 피해를 입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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