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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 == {{빛}} === 외교를 중시한 이승만의 이념 그 자체 === {{클라스}} {{빛}} {{인용문|외교에는 귀신}} 이승만이 잘한 일들 중에 유난히 외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이승만이 독립운동부터 외교적 방법으로 하던 양반이라 이쪽으로 개씹고수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많은 외교관들과 교류했고 한국에서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꿀 빨았다는 헛소리 때문에 일방적으로 까는 풍조 때문에 잘 안 알려졌지만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침 미국이 일본과 싸우며 반일 여론이 형성되자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1940~50년대 당시 한국이 국제 정세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외교를 중시했던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다만 국내 정치를 잘못한 게 문제. 이승만이 미국에서 놀면서 꿀 빨고 독립자금 횡령했다는 개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병신들이 있는데 애초에 돈 한 푼 안 들고 미국 가서 연설 같은 거 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살았다. 그리고 타국에서 활동하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다르게 자신이 활동하는 나라의 국적을 얻지 않고 무국적자로 살았다. 또한 일본에게 현상금까지 걸려있던 터라 짐칸에 밀항하는 방식으로 출국을 했다고 한다. 미국 가서 독립시켜 달라는 게 무슨 독립운동이냐면서 억까하는 깨시민들이 많은데(사실 박정희도 이런 논조로 이승만을 폄하하긴 했다.) 독립하려면 '독립' 외치거나 일본군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는 게 아니라 국제적인 국가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승만은 이것 때문에 외교 독립 운동을 했던 것이고 임시정부 또한 외교 독립 노선을 타긴 했다. 이 양반과 비슷한 방식으로 독립 운동을 했으나 성향은 [[극좌|정반대]]였던 놈이 있는데 그게 바로 [[박헌영]]이다. 흔히 이승만의 외교를 까는 논리로 6.25 당시 북진통일 억지를 부린 걸 드는 사람이 있는데 존나 복잡한 국제 정치를 표면으로만 보고 말하는 거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의 억지 때문에 미국이 이승만을 몰아내는 레짐 체인지 작전을 짤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고 하는데, 그건 표면적인 것이고 이승만의 목적은 미군이 주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아무리 이승만이 짜증나게 해도 한국을 버릴 수는 없었기에 이걸 알고 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핑계로 미군을 주둔시켜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하술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 {{신의한수}}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이다. 6.25에 중공이 참전하면서 전선이 고착화되자 미국이 슬슬 발을 빼려고 하는 걸 눈치채고 전쟁 끝난 후에도 미국이 한국을 지켜줘야 전쟁이 또 나지는 않을거라는 판단 하에 반공 포로들을 한밤중에 몰래 석방시키는 초강수를 두면서 계속 단독으로라도 북진할거라고 유사 땡깡을 부렸다. 미국과 영국에서 이승만 제거 작전을 실행할 뻔했지만 취소되고 결국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었다. 말이 좋아 '상호'방위조약이지 사실상 따뜻한 미국 응디 뒤에 매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미친놈이 미국을 건드리겠냐? 진짜 미국이 한국한테 군대 빌려달라고 할 정도면 미국도 한물 간거라 ㅈ된거고. 이 조약 덕분에 북괴는 60~70년대 중후반까지 남조선의 정세가 심히 불안했음에도 감히 침략할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경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됐다. 지금은 북괴와 러시아와 CCP 대비용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깨시민|북괴와 중공의 노예를 자처하는 자]]들이 미국에 나라 팔아먹은 행위라면서 자주국 드립치며 파기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 [[평화선]] === {{정의구현}} {{참교육}} 한국전쟁 중에 ㅈ본으로부터 [[독도]]와 [[동해(바다)|동해]]를 지킬 수 있었던 신의 한 수. 좌파들이 이승만의 업적을 다른 건 몰라도 이거는 부정하지 못 한다. 원래 당시 국제법에 따르면 영해의 기준은 3해리였으나 좆까고 60해리까지 선을 그어서 독도를 포함해낸 것이다. 미국이 경고했으나 좆까고 그냥 유지했다. 당시 미국은 빨갱이들이랑 싸운다고 아시아 1세계끼리 영해 다툼하는 거 따위는 신경 쓸 틈이 없었고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미국에게 모든 주권이 빼앗겨서 공식적인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ㅈ본은 몰래 우리나라 영해로 들어와서 어업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해군을 보내서 일본 어선을 참교육했다. 이거 때문에 일본 우익들이 아직도 이승만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한다. 다만 ‘60해리가 우리 영해임!’ 이러한 무리수를 쭉 관철할 수 없었기에 결국 반인반신이 정권을 잡은 후 철폐한다. 하지만 아직도 독도는 남조선의 실효 지배를 받고 있으며 동조선은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는 판국이다. 평화선을 제정 안 했으면 이후 독도를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런승만니뮤의 선구안에 부랄을 탁! 치고 간다. 역센징들은 이 때문에 이승만을 깐다. === [[농지개혁법]] === {{신의한수}} 1949년 6월 21일에 제정한 법으로 당시 이승만의 정적 중 한 명이었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혀 해당 법안을 추진하였으며, 지주들의 땅을 유상으로 매입하여 소작농 등에게 유상으로 분배함으로서 자신의 주요 정적인 한민당 국회의원들을 견제하는 한편, 농민들이 빨갱이들의 선동에 놀아나지 않는 등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자세한 건 [[농지개혁법|해당 문서]]를 읽어보길 바란다. === 초등교육 의무화 === {{신의한수}} 이걸로 해방 당시 80%나 되던 문맹률을 10년여 만에 20%까지 낮췄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승만은 결국 이걸로 대통령직을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뉴라이트 사학자들이 내세우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깨부수는데 간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그렇게 부흥했으면 왜 문맹률이 80%나 되냐? 유토피아는 문자가 필요 없는 세상인가 ㅋ === 대미관계 === {{미뽕}}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탓에 반쯤 미국인화 되어 있었다. 사실 1가구 2주택자인데 [[하와이]]에 자기 집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평생 이승만 본인 소유였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거쳐 거기에 기반을 마련하고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대학을 다녀 박사를 땄다. 그러는 동안 아주 오래 미국에 눌러 앉아 살게 되었고 그 탓에 식습관이나 사고방식이 반쯤 미국화 되었다. 그래서 해방 직후의 한국인으로서는 좀 이색적으로, 그렇게 [[햄버거]]를 좋아했고 실제로도 햄버거를 매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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