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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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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한 정리 ===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연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번째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두번째는 고려에의 계승성, 세번째는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 1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이와 관련해 발해는 건국집단의 구성이나 지배집단의 성씨(姓氏) 구성에서 고구려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특히 지배층의 성씨에서 고구려계통의 고(高)씨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발해 초기의 지배층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서 고구려식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문왕(文王)시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고구려의 천손의식(天孫意識)을 원용해 천손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그의 후반기에는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의미로서 고려국(高麗國)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강왕(康王)시대에도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강왕 스스로 국서에서 이러한 의식을 표명한 것은 발해 지배층의 인식을 밝히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편 872년에 일본에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을 내세워 발해 사신을 접대했던 사실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지속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 2 '''[[고려 왕조]]에의 계승성''' 발해의 고려에의 계승성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발해의 멸망 무렵부터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 대화균(大和鈞), 공부경 대복모(大福謨), 좌우위장군 대심리(大審理), 검교개국남 박어(朴漁) 등 고위관료들이 잇따라 무리들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하였다. 또한 세자인 대광현(大光顯)까지 내투해 보호를 받았다. 이로부터 2백여 년간 발해 유민들이 간헐적으로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일부를 이루게 된 것은 민족적 계승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태(太)씨는 고려로 들어온 발해 왕실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의 신하였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황제국의 질서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통일신라와는 다른 태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고려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의 계승성도 유추될 수 있다. * 3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종래에는 2백여 년간 대립적이었다고 일컬어져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장애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먼 것으로, 양국은 상호 대립 혹은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양국이 대립하거나 세력 경쟁을 벌였던 사건으로는 먼저 733년에 벌어졌던 양국 사이의 전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의 요구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했던 이 전쟁을 제외한다면, 양국 사이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 9세기에 들어와 신라의 국세가 약화되고 반대로 발해의 국세가 강화되면서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신라와 현실적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발해 사이에 당나라에서 상호 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양국 사이에 교섭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다수 나타난다. 발해 건국 직후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또 ≪삼국사기≫을 보면, 790년(원성왕 6)과 812년(헌덕왕 4) 두 차례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때의 파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당시 개설되어 있던 신라도(新羅道)를 이용했을 것이다.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의 하나로서 신라도가 들었고, ≪고금군국지 古今郡國志≫에는 발해의 책성부(柵城府)와 신라 국경의 천정군(泉井郡)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하였다. 양국 사이에는 이렇게 상설적인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훨씬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발해의 3성 가운데 선조성(宣詔省)이 있는데, 9세기 통일신라에 선교성(宣敎省)이 설치된 것은 명칭의 유사성으로 보아 발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으로 세 가지 검토를 통해 발해사가 한국사에 접목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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