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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차 북벌 ==== 이해 12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를 학소를 보내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고 공성병기를 많이 잃어 퇴각했다. 이때 위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2차 북벌) 바로 다음해인 229년 1월에,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 음평을 공격하고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하니 마침내 두 군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은 두군을 점령하고 저, 강의 이민족과 서로 통했으며 촉한의 방위와 위나라 진출의 교두보를 닦은 공으로 다시 승상이 되었다. (3차 북벌) 이후 230년에는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위군이 별 소득 없이 불러가자 위연과 오반을 보내 위군을 다시 격파하였다. 231년 2월에,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병했다. 목우(牧牛)로 군량을 운송하면서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이 옛 북지의 석성에 도착해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기산 북동쪽인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곽회와 비요의 위군과 조우해 그들을 격파하고 보리를 대거 수확했다. 그러나 보리의 손실을 우려한 사마의의 본대가 급진해 험준한 곳에 이르자, 양군은 각기 진채를 정비하며 대치했다. 이후 촉군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자 위군이 이를 쫓아가 5월 10일 경, 노성 부근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이, 기산 남부에서 장합과 왕평이 크게 싸웠는데, 노성에선 제갈량이 사마의를 막고, 기산에선 [[왕평]]이 [[장합]]을 격퇴했으며, 이에 위군의 두 지휘관이 퇴각하여 본진을 지켰다. 이후 [[이엄]]의 거짓보고로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을 추격하게 했고 제갈량은 장수 장합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제갈량이 돌아온 이후 이엄의 속임수가 밝혀지고 이엄은 파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4차 북벌) 이건 권모술수 쩌는 사마의가 장합을 일부러 사지로 내몬거라는 떡밥이 있는데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장합은 출병을 꺼려했다는 사서 기록이 있다. 4차 북벌에서는 [[손권]]의 찐따짓 때문에 실패했다. 제갈량과 손권은 둘이 동시에 위나라를 쳐들어가자고 협의했다. 제갈량이 장안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동시에 손권이 합비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작전계획이다. 때마침 [[장료]]가 죽은 이후인지라 손권은 나름 기회라 생각했었지만 '''손권은 출병하자마자 [[만총]]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결국 제갈량의 4차 북벌도 같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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