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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패권대결== ===배경=== 북부의 '''프로이센'''은 초기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뼈아픈 패배 이후, 수구적이지만 효율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프로이센은 1794년부터 대대적으로 농노를 해방시키기 시작하였고, 1811년의 법령을 통해 영주들이 소유한 농토의 1/3을 해방농노들에게 그간의 배상으로 지불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에서 자영농이 증가하였으며, 인구밀도가 낮은 동부 프로이센에서는 상업화된 영농이 확산되어 근대경제의 기반이 되었고 1820-30년대부터는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어 갔다. 1830년에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에서 관세동맹이 창설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여기에서 빠졌다. 이는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영향력 증가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감소를 초래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우위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년에 일어난 독일 혁명에서 베를린 시민들은 빈 시민들과는 달리 프로이센 정부로 하여금 독일 통일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프로이센 정부는 소요를 막기 위해 이에 응하였으며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소집하였다. 1849년 2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자체적으로 헌법을 채택하고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빈 체제와 독일 연방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해산되었으나 대신 프로이센은 1850년 에어푸르트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오스트리아는 곧바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이에 맞불을 놓았다. 그러던 도중 같은 해 말에 독일 연방의 헤센<I>Hessen</I>에서 사회주의 폭동이 발생하였다. 프로이센은 에어푸르트 동맹군을 이용하여 헤센의 폭동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이와 같은 프로이센의 경찰행위에 오스트리아가 즉각 경고를 보내는 등 강경자세를 취하자 긴장이 흐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외교적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빈 체제와 독일 연방은 다시 1815년의 상태로 돌아갔으며,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이 다시 부활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다시 독일의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손을 잡고 함께 덴마크에게 참교육을 시전하였다. 전쟁 후 가슈타인 협정으로 슐레스비히의 영유권은 프로이센이 가져가고, 홀슈타인의 영유권은 오스트리아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이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함정이었고, 오스트리아령 홀슈타인은 프로이센의 영토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슐레스비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지난 1866년, 프로이센은 또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였는데, 바로 재상인 비스마르크가 새로운 독일연방국 창설을 제안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북부는 베를린(프로이센), 남부는 뮌헨(바이에른)이 주도권을 가지고 남북독일을 통일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오스트리아를 독일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홀슈타인의 오스트리아 총독은 비상시기가 도래함을 느끼고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프로이센 측이 이를 두고 가슈타인 협정의 위반이라 주장하며 홀슈타인에 군대를 진주시켜 점령해 버렸다. 이로 인해 공식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니나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메이져 신문인 비너 차이퉁<I>Wiener Zeitung</I>에 이례적으로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국민들에게 제국을 신뢰해 달라고 주문했지만 정작 황제 본인부터가 제국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낸 오스트리아 정부는 독일 연방의회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제재안을 발효시켰고, 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표는 이에 반발하여 퇴장함에 따라 양국간 전쟁이 개시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인구는 프로이센 왕국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 본토와 이탈리아 북부, 보헤미아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영토의 대부분이 낙후지역이었으며 그나마 있는 선진지역들도 프로이센에 비하면 산업화가 더딘 지역들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자국의 탁월한 철도망을 이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전장으로 수송하였으나 오스트리아는 수송능력 면에서 프로이센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무기기술과 보급수준도 뒤쳐져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식 소총으로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프로이센군과 맞서야만 하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군은 다국적 군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장교들은 한 가지 명령을 내리기 위해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써야만 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사회의 계급주의가 군대에도 만연해 있어 하급귀족 군인은 평민출신 상관의 명령을 씹고, 상급귀족 군인은 하급귀족출신의 지시를 쌩까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외교적으로도 프로이센은 남유럽의 신흥강국인 이탈리아와 비밀공수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남북 양면에서 적을 상대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핸디캡을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4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손실을 내어 지휘부가 와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항복해야만 하였다. 전쟁은 불과 2달여만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이탈리아 영토들을 상실하였으며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고 빈 체제는 그 종언을 고했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제국의 국제적 지위와 위신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와 같은 대외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내부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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