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삼국시대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문화 == 삼국시대인들의 [[신앙]]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조상신을 숭배함은 물론 천신(天神)이나 산천신들을 섬겼다. 삼국시대 중반 이후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일반민 사이에서도 불교가 확산되었다. 이외에 중국에서 형성된 [[도교]]가 들어와 신앙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문화와 접촉하기 쉬운 만주지역에서 성장하여 가장 먼저 고대국가를 성립시켰고, 오랫동안 한나라의 침략 세력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자주적으로 외국 문화를 수입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문화뿐 아니라 [[인도]]문화·서역문화 및 북방문화와 먼저 접촉하면서 이를 정리, 소화하여 고대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백제·신라에 전하는 구실을 하였다. 고구려는 한국 고대문화의 기준을 먼저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의 진행을 볼 때, 사회의 문화기반은 중국문화와의 격차가 커서 중국문화 수입에 치중하면 토착 문화가 해체되는 작용이 일어나 자주적인 발전이 저해되었다. 또한 새외민족(塞外民族)과 연결하여 중국과 대결하는 경우에는 복합적인 사회를 운영해 보지 못한 동북 아시아 문화의 한계성에 부딪히게 되었다. 따라서, 삼국문화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러한 양면적 한계성을 극복하며 성장하였다. 삼국시대 문화사에 있어 불교의 역사적 기능과 공헌은 대단히 컸다. 삼국의 불교는 고구려의 낭법사(朗法師), 백제의 겸익(謙益), 신라의 원광(圓光)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불교는 원래 유일신 신앙과는 달라서 각 지방의 토착 신앙을 부인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섭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불교 이전의 전통 문화와의 갈등이 심하지 않았다. 또 국가 성립 전단계에 비하여 크게 확대되고 복잡해진 고대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하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고대문화를 전달하는 구실을 하여 삼국의 고대문화 발전의 길잡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나 서역, 중국이나 북방 민족과 우리 나라 삼국에 공통되는 국제문화의 기준을 제공하며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다. 이로써 삼국으로 하여금 국제문화 정세를 자각하고 한족 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문화적 탄력성을 갖게 하여 한문화(漢文化)에 전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한국불교가 가지는 호국사상도 이러한 역사적 전통 밑에서 성립된 것이다. 원광이 제시한 세속오계도 신라의 전통적 사회 체질을 토대로 유교와 불교를 아울러 이해하면서 세운 신라 고대사회의 가치 기준이었다. 이와 같이 삼국사회는 불교를 통하여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편, 삼국은 공히 중국으로부터 한학(漢學)을 수입하여 배우는 데 노력하였다. 한학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 고중세의 종합적 학문으로, 삼국은 이의 습득을 통해 통치 철학을 보강하고 행정의 체계화를 시도하며 보다 세련된 문화생활을 도모하였다. 고구려는 태학이라는 국립 대학을 세워 지배층의 자제들로 하여금 유교의 경전을 위시한 한학을 학습하게 했고, 백제의 경우도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서적을 수입하여 학자를 양성하고 이를 일본의 전신인 왜에 전달함으로써 아스카(飛鳥)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라의 경우 대학인 국학(國學)은 통일기에야 세워졌지만 학자들이 스스로 유학 경전을 통해 제자를 기르기도 하며 중국에 [[유학]]하여 배워오기도 하였다. 이 시대 한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일찍이 ≪유기 留記≫라는 사서가 편찬되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흥(高興)이 ≪서기 書記≫를 편찬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6년(545) 널리 문사를 모집하여 국사를 편찬한 바 있다. 금석문(金石文)으로는 고구려의 것으로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장수왕 때의 것으로 보이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등이 있고, 신라의 것으로는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를 위시하여 4개의 진흥왕순수비 등의 비문들이 남아 있다. 백제의 것으로는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사택지적비문(沙宅智積碑文)이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이나 중원비문에는 유교 사상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당시 고구려 문화의 성격이나 경향에서 온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진흥왕순수비에서는 ≪서경≫과 ≪[[논어]]≫의 구절을 이용하면서 고대국가의 왕자의 권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고대국가적 경험의 단계가 ≪시경≫이나 ≪서경≫에 나타난 [[주나라]]의 정치·사회경험과 유사하여, 삼국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12년(진평왕 34)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시경≫·≪서경≫·≪예기≫·≪춘추≫ 등을 읽은 것이 나타난다. 이로써 당시 청소년들이 새로운 교양을 갖추기 위하여 경전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541년(성왕 19) 양나라에 ≪열반경경의 涅槃經經義≫ 등 불교 서적과 모시박사(毛詩博士)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이것은 불교나 한문학 또는 유교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말기의 것인 사택지적비문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까지 나타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말기에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여 불교와의 마찰이 발생하는 문화파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삼국시대 말에 신라의 강수(强首)는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데 능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한문]] 수사에 있어서 그 수준이 향상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한학이란 정치이념의 표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의학(醫學), 역학(曆學), 병학(兵學), 율학(律學) 등 중국의 학문 및 문화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 강수같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태학이 세워진 이래 3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학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가 삼국시대에 와서 문화적 개성을 확립하여 문화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반도는 기후가 온화하여 농업에 적합하므로 한 곳에 정착하여 지속적으로 문화를 축적할 수 있었다. 둘째, 전국시대부터 산동성(山東省)을 중심으로 북중국 일대에 살고 있던 맥족(貊族)이 보다 앞선 중국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동하여 옴으로써, 이미 성립되어 있던 고조선의 청동기문화 전통과 복합할 수 있었다. 셋째, 각 지방에서는 이러한 유이민들이, 북방에서는 부여족 계통이, 남방에서는 한족 계통이 수많은 초기국가(부족국가, 성읍국가)를 세우면서 철기문화 기반을 넓히고 저마다 개성 있는 지방문화를 성립시켰다. 넷째, 삼국이 성립된 뒤 불교를 통하여 당시의 국제문화를 폭넓게 이해함으로써 삼국의 고대문화는 보다 다양한 탄력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밀도도 높아지고 세련되는 과정이 있었다. 국내·국외를 물론하고 전쟁으로 영일(寧日)이 없었으면서도 삼국은 충분한 능력을 가진 고대문화를 건설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왕과 귀족세력이 거주하는 수도에는 궁궐·관청·불교사원 및 귀족들의 조상신이나 토지신·농업신을 모시는 신사가 설립되었다. 또한,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시장]]이 개설되고, 수도의 안전을 위하여 궁궐과 관청을 보호하기 위한 내성(內城)과 일반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羅城)을 축조하였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지형적 조건으로 나성을 쌓지 않고 외곽에 [[산성]]을 쌓아 방위하였다. 이와 같이 수도의 도시문화가 발달하게 되어 삼국의 문화는 도시 중심의 귀족문화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외국 문화와의 접촉과 수용은 주로 사신의 내왕과 불교승려의 유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북조(北朝)의 문화를, 백제는 남조(南朝)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것을, 뒤에는 백제의 것을 받아들였는데, 중국과의 교통도 여제 양국의 교통로에 의존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중국 음악의 수입에 잘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는 서역 음악과 북조계의 음악을 받아들여 거문고·공후·피리·생(笙) 등과 요고(腰鼓)·담고(擔鼓) 등의 타악기를 사용하여 그들의 기질에 맞는 활기찬 음악을 만들어냈다. 한편 백제는 남조계의 청악(淸樂)을 양나라로부터 들여왔는데, 타악기의 사용을 즐기지 않아 고구려와는 달리 전아(典雅)한 음악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음악은 진흥왕 때에 와서 가야 음악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야금 연주에 맞추어서 무용과 노래를 곁들이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진(晉)으로부터 칠현금이 들어오자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嶽)은 이를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고, 그 뒤 통일기에 옥보고(玉寶高)가 다시 30곡을 작곡하였다. 비파나 대금·중금·소금 등 삼죽(三竹)은 일찍부터 신라에서 발달했는데, 이것들은 중국의 것을 본받아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금은 본래 중국의 쟁(箏)을 고쳐서 만든 것인데 우륵(于勒)이 12곡을 새로 작곡한 바 있고, 가야가 망한 뒤에도 신라에 전해져 오늘날의 우리 음악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들을 통해 볼 때, 삼국은 중국의 음악을 수입하여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게 악기를 개조하기도 하고 스스로 작곡도 하여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진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고대국가가 성장하고 귀족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궁궐·사원·성곽·고분 등의 건축 기술, 또는 각종 무기 제작 기술 및 장식품 제작을 위한 세공 기술이나 유리·옥 등의 제조 및 가공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고분 축조에 따라 발달된 고구려 고분벽화의 회화 기술은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뒤 초기에는 주로 북위(北魏)의 양식을 모방한 불상이 고구려에 나타났다. 그런데 불교가 보급되고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불상 제작도 세련되어갔다. 신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경주 삼화령(三花嶺) 석조미륵세존의 협시불인 앳되고 가련한 모습의 속칭 ‘애기부처’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고대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철학을 생각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 나오기도 했다. 탑을 만드는 기술에서는 백제가 가장 앞섰는데, 목탑은 남은 것이 없으나 석탑으로는 익산의 미륵사탑, 부여의 정림사탑이 남아 있어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황룡사의 구층탑도 백제인 아비지(阿非知)가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이같은 석탑 조성 기술은 통일신라기에 계승되어 석가탑·다보탑으로 승화 발전되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