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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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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 가산군 지역 === [[고려]]이전까지 신도군(信都郡), 혹은 고덕현(古德縣)이었다. 960년 습홀(濕忽)에 성을 쌓고 가주(嘉州)로 승격되었으며 995년 방어사가 파견되었다. 1220년 반란이 일어나 무령현(撫寧縣)으로 강등먹었고 1230년 몽골군의 공격때문에 치소를 섬으로 옮겼다. 1260년 섬에서 육지로 돌아와 [[태천군|태주]], [[박천군|박주]], [[영변군|무주, 위주]]를 속주로 두고 가주의 머튽이 4개속주의 민정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박주만 남고 나머지는 독립했으며 1371년 남은 박주까지 독립되었다. 1413년 가산군으로 개명되었다. [[홍경래의 난]]의 주동자였던 [[홍경래]]가 본군 다복동을 근거로 1811년 12월 18일 반란을 일으켜 군수 정기(鄭蓍)의 부자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박천 송림동에서 관군에게 패해 정주에서 알박기를 시전하면서 관군에게 넘어갔다. 이후 부군면 통폐합때 반토막이 나 일부지역은 박천, 일부는 정구로 편입되었다. 북괴치하에서 [[군면리 대폐합]]때 운전군이 되었다. ==== 가산면 ==== '''嘉山面''' 現 북괴령 평안북도 운전군 대연리 일부, 가산리, 용봉리. 면적 64.12㎢. 면 소재지는 동문동. 동문(東門), 남신(南新), 대성(大成), 봉서(鳳西), 봉소(鳳巢), 신사(新沙), 용탄(龍灘)의 7개동을 관할했다. [[고려]]이전까지 신도군(信都郡)이라 불렸다. 적유산맥의 여파로 인해 산세가 험준하고 평야가 협소하며, 중앙의 봉두산을 필두로 하여 면 대부분이 200m언저리의 구릉지대로 구성되있었다. 서남쪽 경계에 장수탄강이 심한 곡류를 만들며 남류하고, 그 근처와 동북부에 있는 삼가저수지에 약간의 충적평야가 만들어졌다. 이런 환경때문에 쌀보다는 조, 수수, 옥수수, 감자, 콘, 목화가 주로 생각되었고 평북지역 산악지대답게 목재, 목탄, 장작, 그리고 삼베, 명주가 생산되었고 소, 닭, 돼지가 사육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성동과 신사동에는 소량의 [[흑연]], [[금]]이 채굴되었다고 한다. 동문동에는 봉두산성(鳳頭山城), 혹은 내성(內城)이라고 불렸던 고려시대의 습홀성(濕忽城)이 있는데 석축둘레가 약 299.3m이고, 성 안에 우물 99개와 못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봉두산에는 고려 [[문종 (고려)|문종]]시기 건립된 천황사(天皇寺), 동문동에는 가산향교와 충렬사, 효성산에는 성좌(星座)에 제를 올렸다는 효성대(曉星臺)가 있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모든 동이 리로 바뀌었고 남신리에서 지장리(紙場里), 대성리에서 내의리(來儀里), 봉서리에서 평지리(坪地里)가 신설되어 동문, 남신, 지장, 대성, 내의, 봉서, 평지, 봉소, 신사, 용탄의 10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때 '''대연리 일부'''(내의리 + 대성리 + 청룡면 소삼리), '''가산리'''(지장리 + 동문리 + 남신리 + 봉소리), '''용봉리'''(봉서리 + 신사리 + 평지리 + 용탄리)로 개편되어 대연리로 넘어간 내의, 대성리는 박천군에 나머지 가산리와 용봉리는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54년 대연리가 운전군으로 편입되면서 전면지역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 서면 ==== '''西面''' 現 북괴령 평안북도 운전군 금계리, 송학리, 학산리. 면적 31.73㎢. 면소재지는 송담동. 송담(松潭), 와현(瓦峴), 성산(聖山), 근장(芹場), 하양(河陽), 용진(龍津), 운포(雲浦), 금계(金鷄)의 8개동을 관할했다. 본래 가산군 서면이었다. 동북쪽 가산면과의 경계에 황학산, 서쪽 정주군과의 경계에 칠악산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100m내외의 구릉지대가 형성되었다. 장수탄강이 면중앙을 북에서 동남방향으로 곡류를 이루며 흘러 대령강으로 들어가고 대령강이 동,남부경계를 따라 흘러 수리시설이 좋은 넓은 평야가 전개되었다. 금계동에 육영서원, 황학산에 윤관장군을 모신 조양사, 황하산의 금계사, 칠악산의 선혈사와 백운암등이 있었지만... [[6.25 전쟁|알지?]] [[도서정리사업|어쩔 수]] [[고난의 행군|없어]].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를 실시하면서 송담리에서 송죽리(松竹里), 와현리가 반토막나 학현리(鶴峴里), 와곡리(瓦谷里), 하양리에서 곡하리(曲河里)가 신설되어 송담, 송죽, 학현, 와곡, 성산, 근장, 하양, 곡하, 용진, 운포, 금계의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때 '''학산리'''(운포리 + 하양리 + 곡하리 + 용진리), '''송학리'''(송담리 + 송죽리 + 근장리 + 성산리), '''금계리'''(금계리 + 와곡리 + 학현리)로 개편되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학산리와 송학리가 각 일부를 주고받았고 학산리는 금계리의 일부를 흡수했다. ==== 양가면 ==== '''兩嘉面''' 現 북괴령 평안북도 운전군 운전읍, 보석리 일부, 구련리, 서삼리, 봉덕리, 동삼리. 면적 63.31㎢. 면 소재지는 영미동. 영미(嶺美), 연지(蓮池), 구정(九井), 연담(蓮潭), 봉산(鳳山), 자하(紫霞), 덕달(德達), 선사(善士), 덕인(德仁), 심태(深台), 서동(瑞東), 어의(於義), 보석(寶石)의 13개동을 관할했다. 1935년 박천군 가남면과 가동면을 합하면서 만들어졌다. 북동부는 옥녀봉을 중심으로 구릉지대를 이루고, 대령강이 남계를 따라 서남류하며 그 지류가 면 전체에 흘러 하천변에 평야지대가 만들어졌다. 영미동지역에 영미역이 있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를 실시하면서 영미리에서 미림리(美林里) + 유동리(柳洞里), 보석리에서 지석리(支石里), 심대리에서 심현리(深峴里), 선사리에서 동문리(東門里)가 신설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때 '''보석리'''(보석리 + 어의리 + 지석리), '''구련리'''(연담리 + 연지리 + 구정리), '''영미리'''(서동리 + 미림리 + 영미리 + 유동리), '''서삼리'''(심현리 + 덕인리 + 심대리), '''봉덕리'''(봉산리 + 덕달리), '''동삼리'''(자하리 + 선사리 + 동문리)로 개편되어 전지역이 박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54년 전지역이 운전군으로 이관되었는데 1954년 보석리의 일부와 영미리가 운전읍으로 개편되었다. ==== 용계면 ==== '''龍溪面''' 現 북괴령 평안북도 정주시 오룡동 일부, 운전군 청정리 일부, 삼광리. 면적 90.58㎢. 면 소재지는 오룡동. 오룡(五龍), 원산(元山), 하단(下端), 은봉(隱鳳), 삼광(三光), 인봉(仁峰), 고창(古倉)의 7개동을 관할했다. 본래 가산군 서북면이었는데 부군면 통폐합때 박천에 통폐합되면서 [[정주군]] [[정주군#마산면|마산면]] 춘산동일부가 원산동(元山洞)으로 편입되었는데, 우너산동이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에 통폐합되면서 사라졌다. 동남단 목우산<ref>소를 방목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정월대보름에 이 산에서 달이 뜨는 포지션을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ref> 이외에 높은 산은 없지만 300m내외의 잔구성 산지로 사방이 둘러싸인 산간지대라 장수탄강이 남류하면서 생기는 평야말고는 평지가 거의없다. 주민들 대부분이 화전민으로 살았다. 조, 옥수수, 수수, 콩, 팥등의 잡곡이 생산되었고 목탄, 황밤이 생산되었으며 고창동의 운모광에서 광물이 채굴되었다. 원산동에선 유기공업(놋쇠그릇)이 발달하여 납천이유기로 불리던 놋그릇이 생산되었다. 은봉동, 하단동과 정주군 덕언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장수탄강을 막으면서 생긴 동인저수지가 경치가 아름답다고 이름났다고 한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를 실시하면서 삼광리에서 삼원리(三院里), 고창리에서 상감리(上甘里), 오룡리에서 은창리(隱滄里)와 원하리가 각각신설되어 오룡, 은창, 원하, 원산, 하단, 은봉, 삼광, 삼원, 인봉, 고창, 상감의 11개리로 개편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때 '''은봉리'''(은봉리 + 원하리), '''오룡리'''(인봉리 + 은창리 + 오룡리), '''삼광리'''(삼광리 + 삼원리 + 고창리 + 상감리)로 개편되어 전역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원산리는 종범했다... 은봉리는 1954년 청정리(정주군 마산면 청정리 + 두무리 + 청남리 + 청산리 + 춘산리)와 오룡리에 반토막나서 분리편입되었고 결국 폐지되었다. 오룡리는 1954년 은봉리의 절반을 흡수, 일부지역을 삼광리에 내주고 정주군으로 옮겨졌는데 1994년 정주군 고안면에서 신설되었던 연봉리(舊 고안면 연봉리 + 두봉리)를 흡수하고 동으로 승격되었다. ==== 청룡면 ==== '''靑龍面''' 現 북괴령 평안북도 운전군 북일리, 박천군 삼봉리, 청룡리, 대연리 일부, 삼화리 면적 62.57㎢. 면 소재지는 응봉동. 응봉(鷹峰), 위령(威靈), 노전(蘆田), 운흥(雲興), 봉지(鳳之), 광성(光星), 인덕(仁德), 만수(萬壽), 대화(大化), 장신(長新), 일화(一和), 은룡(隱龍)의 12개동을 관할했다. 1935년 북면의 창신동, 일화동, 은룡동이 편입되었다. 동쪽에 원수봉(元帥峰, 160m), 남쪽에 청룡산, 중앙에 응봉산(鷹鳳山, 201m), 토함산(吐含山, 253m)이 있어 대부분이 산간지대지만 험준하진 않다. 계지천이 면 북부를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인덕동에서 대령강과 합류, 대령강이 동쪽 경계를 따라 남류해 하천주변에 평지가 형성되었다. 노전동, 운흥동에서 운모, 위령동과 노전동에서 약간의 흑연이 채굴되었다. 만수동, 인덕동사이에있는 원수봉은 대령강과 접해서 경치가 뛰어나며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홍경래, 우군칙이 결연한 청룡사가 본면 대화동에 있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대화리에서 소삼리(小三里), 만수리에서 자신리(慈信里)가 신설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때 '''삼봉리'''(봉지리 + 인덕리 + 응봉리), '''청룡리'''(만수리 + 자신리 + 대화리), '''대연리 일부'''(소삼리 + 가산면 내의리 + 대성리), '''삼화리'''(장신리 + 일화리 + 은룡리), '''북일리'''(광성리 + 노전리 + 위령리 + 운흥리)로 개편, 북일리는 운전군, 나머지는 박천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박천군으로 편입된 삼봉, 청룡, 삼화의 3개리가 운전군으로 넘어왔지만 4년뒤 원상복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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