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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 {{지옥그자체}} {{헬보딸}} 2차 대전 이후 스탈린이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라는 빨갱이 하나를 서기장에 앉혀놓으면서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루마니아는 이때 소련의 지원을 받아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우상화 정책과 경제발전을 시작했으며 점진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니 사람들이 슬슬 늘어질 때 쯤 게오르기우데지가 1965년에 폐암으로 뒤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의 뒤를 악명높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이어 루마니아를 통치했다. 흔히 차우셰스쿠가 막장으로 국정운영한걸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건 지진+[[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침체로 거의 반송장 국가가 됬던 80년대 중반때 일이었고 초반엔 나름 선방했다. 1966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1970년 까지 국민총생산 1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수립해 해외에서 자산을 빌려와 중공업 정책과 탈농정책을 시작했다. 이때 반소련 노선을 걸으면서 서구권과 협력해 중공업을 육성해 무역 흑자가 늘어났고 당시 루마니아는 [[동독]], [[유고슬라비아]] 부럽지 않게 잘 살았다. 이때 자가용도 보급되어 해외로 2년에 1번씩 여행갈 수 있도록 국가가 허락해줬고 서방제 영화, 만화 등을 읽을 수도 있어서 65년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지지가 높아 국정이 안정적이었다. 문제는 차우셰스쿠 이 새끼가 북한에서 이상한걸 줏어다 왔는데 바로 북한식 [[우상화]]정책이었다. 70년대에 북한 순방을 하며 [[김일성]]의 우상화 정책을 보곤 루마니아에 벤치마킹한 것이다. 앞서 게오르기우데지도 우상화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스탈린주의에 입각해 '인민의 해방자 겸 루마니아를 위한 지도자' 정도로만 우상화 했지 차우셰스쿠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차우셰스쿠 동지'''급의 신격화를 자행했고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을 모방해 게오르기우데지 격하운동을 주도했다. 근데 이게 문제가 되는게 김일성의 경우 북한의 초대 국부이면서 타격은 1도 없었지만 그래도 항일운동을 통해([[보천보 전투]]) 이름이라도 널리 알렸지 차우셰스쿠는 나치 집권기 동안 아무것도 안했고 훗날 선임 눈에 들어 운좋게 후계자 자리를 얻은 케이스였다. '게오르기우데지 동지의 후광을 이어받은 지도자' 급에서 끝냈다면 훗날 벌집은 안당했지 전임자는 순식간에 팽해버리고 지를 신격화 하면서 후반기에 국민적 불만이 폭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쨌든 이런 우상화 정책은 인민들에게 비웃음과 반감을 샀지만 눈부신 경제성장에 묻혀 묵인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면서 루마니아는 서서히 맛이가기 시작했는데 소련을 모방한 중공업 몰빵 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구 공산권 국가의 중공업 중심 산업체계의 문제점은 초반의 가시적인 성장률만 보고선 외채를 들여와 더 지어보자며 빚만 불리다가 세계 시장이 침체되거나 더이상 시장이 매력적이지 않다 판명되고 투자금이 빠진다면 한순간에 붕괴되버리는 [[버블 경제]]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오일 쇼크]]로 인해 세계 시장이 침체되자 루마니아는 130억 달러의 부채에 허덕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77년 부쿠레슈티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국가 재건을 위해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해 쇠락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 80년대 초반까지는 예전만은 못해도 나름 먹고 살만은 했는데 중반부터 배급량이 줄어들고 실업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는 이때 인민의 고통을 함께 겪겠습니다 ㅜㅜ하고 사렸다면 나중에 뒤지지는 않았을텐데 긴축정책을 펴면서도 당시 [[펜타곤]] 다음가는 크기의 인민궁전을 지으며 온갖 호화로운 사치생활을 누려 큰 불만을 사게되었다. 심지어 이에 따른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비밀경찰 세쿠리타테를 통해 루마니아 전국에 도청기를 뿌리고 (심지어 일반 가정집에도 뿌렸다) 또 출산율 높이겠다고 가정마다 5명 이상의 아이를 의무적으로 낳게 하던 출산정책으로 인해 가뜩이나 먹을 것도 없는데 애까지 낳으라고 하니 당연히 국민들은 차우셰스쿠와 공산정부를 벼르고 있었다. 결국 1989년 루마니아 서부의 중심도시 티미쇼아라에서 반 차우셰스쿠 시위 유혈진압을 통해 루마니아 혁명이 발발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이때 자기의 위엄으로 혁명을 진압해보겠다며 부쿠레슈티 광장에서 연설 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우리 인민들 잘먹고 잘살아요 ㅋㅋ 우리 루마니아가 짱이야!' 이 지랄을 떠는 바람에 군중의 화만 더 돋구었다. 결국 군대를 통해 유혈진압을 시도하려 했으나 국방장관 바실레 밀레아가 진압을 거부한 후 암살 당하자 루마니아 인민군 마저 차우셰스쿠에게 등을 돌리고 군수장비와 장갑차를 뽀려서 탈영 후 민중들과 함께 혁명군을 조직했다. 이후 루마니아 공산당도 차우셰스쿠를 손절해버렸고 1989년 [[12월25일]]날 니콜라에와 그의 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가 사형을 선고받고 [[벌집피자]]가 된 후 이온 일리에스쿠를 중심으로 한 민족 구국전선이 12월 26일 루마니아 공화국을 선포하며 공산주의 체제는 막을 내리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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