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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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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저술가, 사상가, 저널리스트, 교육자로서는 ㅆㅅㅌㅊ가 맞았지만 정치인으로는 영 아니었다. 나도 량치차오가 근대 중국 사상가 중 원탑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경력은 병신짓한게 워낙 많아서 쉴드 못친다. 야인일때는 어마어마한 유망주였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죽쒔다. 괜히 정치질하다가 사상가, 저술가, 교육자, 저널리스트로 쌓은 기반, 명성 다 무너졌다. 그나마 잘한게 있다면 반원전쟁때 앞장선거 정도. 사실 반원전쟁을 잘만 이용했으면 짱깨 원탑이 될 수도 있었을거다. 그러나 정치적 감각이 부족했던지라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돤치루이 밑에 기어들어갔다. 차이어가 위안스카이 따라 뒤져버려서<ref>사실 차이어 장군님은 반원전쟁 때 이미 와병중이었다. 치료가 급했지만 매국노를 잡겠다며 전장에서 떠나지 않은 것. 이때문에 병이 악화되었고 얼마 못가서 죽은 위안스카이 따라갔다</ref> 군사적 기반이 전무했다는 문제점도 있지만 끝까지 돤치루이랑 놀아나다가 매국노 소리까지 들은거 보면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량치차오의 정치력 부재였다. 솔직히 차이어 요절 안했어도 달라지는건 없었을듯. 당대에도 철새라고 욕 존나 먹었다. 하지만 자기 영달을 추구한적은 없기때문에 철새라고 비하하기는 거시기하다. 사실 미국 여행 이후로 계몽주의자+온건 개혁파 한길만을 걸었다. 최대한 갈등을 줄이고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선을 추구했다고 보면 될듯. 청조 지지했던거, 공화주의 지지했던거, 연성자치론 지지했던거 전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근데 솔직히 량치차오가 하자는대로 했으면 중국 근대사가 그렇게 혼란스럽진 않았을거다. 뭐 너무 이상적이긴했지만 짱깨 본국에선 평가가 박한 편이다. 재평가가 되는 중이긴한데 아무래도 경력이 경력인지라 어쩔 수 없긴하다. 청조 지지+군벌(위안스카이,돤치루이) 지지+ 쑨원 비판+연성자치 지지+공산주의 비판+서구식 의회주의자까지 6연타석 홈런인지라... 당장 신해혁명도 최소 보로운동~위안스카이 축출까진 량치차오>쑨원인데도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받고 있다. 정치 빼고 다 잘했다. 좋게 말하면 다방면의 전문가였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래도 전문성은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전문성이 떨어진다는건 쩡궈판, 캉유웨이, 옌푸, 후스같이 한 우물만 판놈들에 비해 떨어진다는거고 좆문가새끼들이 비빌건 못된다. 급식 역사책에도 나온다. 아마 변법운동 나올때 한번, 5.4운동 나올때 또 한번 언급될거다. 짱깨에겐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조센진들은 망국노라면서 심심할때마다 욕했다. 마지막으로 량치차오의 조선인 비하를 보고 가자(사실 굳이 따지면 당대 짱깨중에선 친한파에 가깝다고 한다. 조선인 깐건 중국도 개혁 못하면 저꼴 난다고 경고한 것) {{인용문|조선인들은 남에게 의존하는 근성이 매우 강하며, 주권의식이 박약하다.|}} {{인용문|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을 키워 서로 끌어 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을 몰랐다. 좋아하는 자는 비록 사악한 악당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모두 추천하여 높이 올려 주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공정하고 선량한 사람이더라도 멀리 보낸다.|}} {{인용문|조선 황제는 기지가 조금 있으나 독단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고 정해진 의견이 없으며 오직 그럭저럭 버티는 데에만 힘쓰고 사람들의 이목을 막으려고만 했다. 또 늘 외국에 기대어 그 지위를 보존하고자 했다.|}} {{인용문|조선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며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 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을 몰랐다. 그 일반 백성은 국사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줄곧 정치 분야에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인용문|조선의 양반이라는 자들은 모두 높이 받들어지고 넉넉한 곳에 처하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일하지 않고, 오직 벼슬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인용문|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들은 사리에 어두워 세계의 대세를 몰랐고 정치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으며 또 논의하지도 않았다. 배운 바를 빌려 관직을 구하는 도구로만 삼았다.|}} {{인용문|고고한 양반들은 이제부터 영원히 멸망하여 종이 되는구나. 아! 저들은 백성의 상전이 되어 구차하게 눈 앞의 안일을 탐했으며 나라가 망해도 나는 부귀하고 편안하다고 하는 자들이다.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인용문|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조선이 그 으뜸이다. 조선 사람은 말하기를 가장 좋아한다. 2,3인이 서로 만나면 하루종일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 {{인용문|외국 사람으로 조선인의 성격을 조금 아는 자는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 말하는 것은 하나도 충심에서 나오는 말이 없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받으면 곧 팔을 걷어올리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곧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인용문|조선 사람은 미래의 관념에 대하여 매우 박약하다. 소민은 한번 배부르면 서로 두셋이서 짝을 지어 차를 다리며 나무 그늘에 쉬면서 한담으로 날을 보낸다. 다시 내일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문제를 계획하지 않고 유유한게 고대 태평시대의 사람과도 같다.|}} {{인용문|벼슬한 사람들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오늘에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에 나라가 망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한 후로부터 모든 사람은 다 조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인용문|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이것을 알았는지 여부를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권 쟁탈하는 것을 보면, 진하고 좋은 술처럼 지극한 맛이 있어 하는 것 같다.|}} {{인용문|이번에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 흘렸는데, 조선 사람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고관들은 더구나 날마다 출세를 위한 운동을 하고, 새 조정의 영예스러운 작위를 얻기를 바라며 기꺼이 즐겼다.|}} {{인용문|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늘 강한 자가 되어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가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인용문|갑오 이후로 조선 황제는 일찍이 군신을 이끌고 조목에서 맹세하며 홍범 14조를 반포했다. 그 조목을 고찰해보면 우리나라의 헌법 강령 9년 주비안 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고 사려가 주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단 맹세한 이후로 그 임금은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인용문|당시 조선을 유람했던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단지 높고 커다란 약간의 건물들이 한성 안에 요란스럽게 세워져있고, 문에 크게 무슨 부 무슨 부라고 쓰여 있는데, 그 안에는 공문서 하나조차 없어 보였다고 한다. 대신들이 회의를 할 때는 탁자 하나에 둘러앉았는데,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한담이 끝이 없어 한마디도 정무를 논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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