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동학농민운동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의의 ==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는 고속도로가 뚫린 사건''' ㄴ 동학 농민군 세력 때문에 나라 망했다는 의미로 읽지 말자. 당장 루이 16세만 봐도 혁명이 터지고 죽이자는 여론은 많지 않았다. 임금을 죽인다는 게 말이 되노? 근데 루이 16세가 처형 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마누라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탈출해서 오스트리아 군을 끌어들여 혁명군을 진압한다는 계획이 탄로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이 16세를 살리자는 주장은 모두 사라졌고 처형할 수 있던 거다. 고종도 마찬가지다. 이건 진짜 선조가 임진왜란 때 쳐맞는다고 나라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을 꾀한 것과 똑같다. 무능한 것까진 그러려니 한다. 근데 어떻게 책임감이 1도 없을 수가 있냐? 지 백성이고 지 나라다. 덕분에 우리가 식민지가 되는 고속도로가 닦여버렸다. 당시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한반도에 발도 못 붙이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중국도 자기 코가 석 자라 내정에 간섭할 여력이 없었고 러시아도 한반도 대신 만주에나 찝쩍거리던 시기였다. 즉 이 병신짓만 없고 이후로도 외세의 개입할 빌미만 안 줬으면 우리는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때 동학난 터지고 파병이 결정되자 이토 히로부미 반응은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다!"'''였다. 일본한테도 조선을 먹을 절호의 기회자 유일한 기회자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그래서 동학난 터지고 나니 잠잠했던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급변해서 거의 매해 대사건들이 터졌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 1895년에는 을미사변, 1896년에는 아관파천, 1897년에는 대한제국 선포, 1902년에는 영일동맹, 1904년엔 러일전쟁, 1905년에 을사조약.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불과 11년 만에 나라가 망해버렸다. [[분류:한국사]]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