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남북국시대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남북국시대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점 === 이상으로 반론을 살펴보았지만,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할 수 없다는 두번째 주장은 여러 가지 증거를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너무 현재적 시각에서 발해사를 바라보려는 세번째 주장도 문제가 있다.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7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남북국시대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 * 1 '''한국사에서 신라사와 발해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보면, 신라사가 발해사보다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가 병존했던 당시에는 양국의 국력이 대등할 정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8세기에는 신라의 국력이 앞섰지만, 9세기에 들어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얻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대등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 있었던 양국 사이의 경쟁사건들은 이를 잘 말해준다. 897년에 양국 사신 사이에 벌어졌던 윗자리 다툼 사건, 872년과 906년에 벌어졌던 양국 유학생 사이의 빈공과(賓貢科) 수석 다툼 사건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기의 계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구분을 하느냐, 아니면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참고가 되는 것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이다. 그 뒤에 일어난 수나라는 기본적으로 북조를 계승한 국가였으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원용한다면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 2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삼국통일을 최초의 민족적 통일로 평가해왔고, 지금도 남한에서는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까지 이 견해를 따르다가, 1960년대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분적 통합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1979년 ≪조선전사≫부터는 부분적인 통합이란 사실마저 부정하였다. 이렇게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려의 후삼국통일을 부각시켜, 고려를 역사상 첫 통일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면 어떻게 신라가 통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론이 상호 배치된다고 하면서 고려의 통일이 최초의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사에서 언제부터 하나의 국가로만 남게 되었는가 하는 기계적이고 외면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고려의 통일이 발해까지 아우른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이러한 주장에는 타당성이 없다. 더구나 발해가 건국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이고,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뒤로부터는 20여 년이 흐른 뒤이다. 따라서 발해는 통일이 일단락된 뒤 새로이 형성된 국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의 건국은 한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삼국통일이 영토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부분적이었다는 한계성을 보완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통일신라나 삼국통일이란 용어와 결코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