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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민족대표 33인은 갑작스럽게 시위 장소를 바꿔서 태화관(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 위치했던 음식점)에서 낭독하고 바로 경찰서에 자수하였다. 이에 당황한 학생들이 찾아가서 따진 뒤 자기들이 독립선언문을 받아와서 탑골 공원에서 읽었다. 이후 그 33인은 체포된다. 그게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씨발... 오등은 자에 아 조선... 이거 옛날 학교에서는 존나 외우라고 시켰다. 이후 만세 시위를 벌이자 민중이 가세하여 삽시간에 수십만이 참여했다. 동시에 시위가 빠르게 번졌고 4월에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산발하면서 순식간에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물론 과잉 진압이나 고문, 보복이 뒤를 이었고(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일본 육군까지 파견되면서 4월까지는 그야말로 전국에서 총 국민의 1할이 참여, 경찰로는 모자라서 일본군 4천 명까지 투입되는 장관을 연출한다. 참여자 100만여 명 중에서 1천여 명이 사망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1/2019022100174.html] 이후 보복이 뒤를 이었고 외신들도 보도하면서 1910년를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초기에는 평화 시위였지만 일본의 학살에 가까운 무력 진압이 알려지기 시작한 3월부터는 열이 뻗쳐 경찰을 때리는 경우도 꽤 있었다. 특히 농촌 지역으로 확산될 때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땅 잃은 농민들이 낫을 들고 일본 경찰 놈들 모가지를 그어버리는 사례도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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