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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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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 == 1979년 당시,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외적으로는 코리아게이트 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2차 오일 쇼크, 부가가치세 제도 실시 등으로 인한 경제 사정과 민심 악화,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야당의 지속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여기에 육영수의 피살, 노쇠 등으로 인한 박정희의 판단력 쇠퇴 때문에 경호실장 차지철은 지나친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박정희의 측근들 내에서도 불화가 일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바로 당시 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이런 내외적 상황이 악화될수록 박정희 정권은 유화적 수단보다는 더 치밀한 정치공작을 동반한 폭력적 수단을 위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 제명으로 이어졌고 동시에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마항쟁|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해당 지역 계엄사령관에게 통보하고 현지 시찰을 위해 내려온 김재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10월 18일, 박정희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도리어 "서울에서도 부산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라고 응수했고, 동석해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도 2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라고 맞장구쳤다. 앞서 설명한 차지철과의 불화, 부마항쟁의 심각성 파악, 미국과의 관계 악화, 박 대통령의 자녀 문제 등으로 김재규의 반감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0.26을 일으키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아침,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중정시설) 준공식에 박정희와 함께하기 위해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시국 상황을 운운하며 김재규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는 김재규의 부아를 더 돋우고 말았다. 오후 4시 경,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대행사를 열기로 하자 차지철은 이를 김재규에게 통보했다. 그와 동시에 김재규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며 궁정동 안가 내 자신의 집무 건물로 초대하였다. 오후 5시 20분 경, 김재규는 친분이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부마항쟁의 심각성,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고, 김계원 또한 이에 맞장구쳤다. 나아가 김재규는 "이 새끼 오늘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발언하면서 살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오후 6시, 박정희와 차지철이 안가에 도착하고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만찬 도중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의 부실함을 힐난하고 나아가 김영삼을 구속했어야 했다고까지 발언했다. 이때 김재규가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박정희는 도리어 정보부가 유약하다며 다시 힐난했고 차지철이 이에 계속 맞장구치면서 김재규의 속은 더욱 들끓어갔다. 뒤에 섭외되어온 신재순과 심수봉이 들어와서 분위기는 다소 전환되었으나 김재규의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후 7시 10분, 김재규는 자신의 부하들인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에게 거사를 통보했다. 박선호는 거사를 미루자고 했지만 김재규는 보안 누설을 이유로 거부했고, 이어서 박선호는 박정희의 포함 여부 질문에 대해서 박정희도 포함된다고 발언하였다. 결국 거사가 결정되자 박흥주는 유성옥, 이기주와 함께 안가 안의 청와대 경호원 사살을 담당했고 박선호는 만찬장 옆방에 배석 중이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의 사살을 담당하게 되었다. 운명의 오후 7시 45분, 신재순이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후렴구를 노래하던 도중, 김재규가 차지철의 팔목을 향해 "이 새끼 너 건방져!"라고 하며 발터 PPK로 1발을 발사하였다. 이에 박정희가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자 김재규는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2발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다시 총을 차지철에게 발사하려던 도중에 격발 불량이 나자 김재규는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가버렸고 김계원 또한 몸을 숨겨 버리면서 상황을 뒤바꿀 수도 있었던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당시 김재규는 간경화를 앓고 있었기에 몸이 좋지 않았다.) 같은 시간 청와대 경호원들 또한 대부분 사살당하거나 무력화되었다. 안가는 본래 중정 요원들이 관리하던 곳이었기에 청와대 경호원들은 포위 당한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만찬장 옆방에 배석했던 정인형과 안재송 또한 박선호에게 살해당했다. 잠시 뒤, 화장실로 도망갔던 차지철이 다시 나와 박정희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박정희는 살아있었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고 차지철은 연신 경호원을 외치며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박선호에게서 M36 치프 스페셜을 받아 든 김재규가 들어왔고, 차지철이 저항하려고 했지만 복부에 2발을 맞고 쓰러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공황에 빠진 신재순이 화장실로 도망가고, 심수봉 또한 병풍 뒤로 숨은 사이에 김재규는 박정희의 오른쪽 귀 위에 2발을 발사함으로서 확인사살을 마쳤다. 이때 박정희 머리에 터널을 깊게 뚫어 박정희를 골로 보낸 제2탄은 아직도 박정희 시신에 박혀있고 지금도 구멍 뚫린 머갈통 속에 같이 묻혀 있다. 사살 직후 김재규는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달려가서 정승화와 김정섭에게 급한 상황이 발생했으니까 함께 가줘야겠다며 반강제로 자신의 차에 태웠고, 궁정동 안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김재규는 3.1 고가도로 (현재는 철거)에서 정승화의 제안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육군 본부로 향했고, 경황이 없던 나머지 국무회의가 소집된 다음에도 미숙한 대응으로 사태의 주도권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사건의 목격자였던 김계원이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와 정승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범인이 김재규라고 실토했고, 김재규가 체포,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면서 10.26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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