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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사 === {{대륙의 기상}}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답게 자기네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되도록이면 데이터가 아작날 수 있는 모바일보다는 컴퓨터로 보도록 해라. [[파일:갈리아.jpg|800픽셀]] '''카이사르 앞에 항복하러 온 베르셍제토릭스''', Lionel Royer(1852-1926) 베르셍제토릭스(기원전 82 - 기원전 46)는 프랑스 역사 최초의 영웅으로 갈리아(골 족) 군의 장수로서 로마 군의 [[카이사르]]에게 맞서다가 패배하고 투항했다. 패장이지만 적장 카이사르 앞에 당당히 선 그의 모습은 후대 역사가들과 예술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참고로 적장인 카이사르도 인정할 정도의 인재였고 카이사르의 관용 노선 덕에 많은 카이사르의 적들이 처벌 없이 지나갔지만 이 프랑스의 장수는 너무나 유능해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 장수는 알레시아 전투 패배 이후에 스스로 항복하고 포로가 되는 모습도 보여줬다. 카이사르의 많은 전쟁 중에 이 정도까지 궁지로 몰았던 장수는 이 사람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 이탈리아, 로마의 군제와 기술 국력 등은 다른 민족(부족)들을 수백년 이상 앞선 사기국가였다. 즉, 저정도 버틴 것도 전투력 쩔게 존나게 잘 버틴거라는 소리이다. 이후 갈리아(골족:현재의 파리 인근 일드프랑스 인근 등)지방은 급격하게 문화가 로마화되었다. [[파일:샤를마뉴.jpg|650픽셀]]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의 대관식''', Friedrich Kaulbach(1822-1903)<ref>독일인인데, 이 사람 빼고 여기서 소개하는 나머지 그림들은 프랑스인이 그렸다.</ref> [[급식충]]들은 샤를마뉴(재위 768~814)를 세계사 시간에 꼭 배운다. 흔히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 마그누스)라고 불리며 영토 확장과 문예 부흥으로 게르만 부족 왕국인 프랑크 왕국의 확장과 전성기를 이끌었고, 자기 따까리인 교황으로부터 후장을 쪽쪽 빨리며 '신으로부터 은총받은 기독교와 서유럽의 절대자(황제)'라며 서로마 제국 황위를 받고 신성로마제국을 열었다. [[파일:부빈전투존엄왕필리프.jpg|800픽셀]] '''부빈 전투''', Horace Vernet(1789-1863) 부빈 전투 당시 존엄왕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를 묘사한 그림이다. 그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함께 3차 십자군에 참여해서 적당히 싸우는 척하며 명예만 챙겨먹고 튀었고 장수타입에 무식한 리처드만 열심히 살라딘과 싸웠다. 그리고 1214년 부빈 전투에서 영국과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가 있은지 이듬해 영국 귀족들은 자기네 국왕의 무능함에 질려서 실지왕 '존 왕'에게 대헌장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대헌장이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이 역시 [[급식충]]이라면 알아둬라. 프랑스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내정에 능했으며, 숙적 영국에 승리, 현 프랑스 지방 내의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 영토를 거의 빼앗아 국왕직할령으로 두게 되어 왕위조차 빼앗기고 공작으로 추락할 뻔했던 카페가문의 프랑스를 일으키고 중앙집권 절대군주정 국가로 나아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엔 프랑스의 숨겨진 국부 영국의 실지왕 '존 왕'의 병신 짓의 혁혁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이 왕이 중요해진 이유는 민족주의의 대두 때문이기도 한데, 이전까지는 Rex Francorum 이라고 라틴어로 '프랑크왕' 이라고만 칭해오던 프랑스지방의 왕령을 1190년부터 Roi de France(프랑스어 전공자라면 익숙한 프랑스어다) '프랑스왕' 으로도 칭하게 된다. 지배계급과 민중언어의 융합이 보인다. 이제 알다시피 프랑스의 어원이 된 프랑크는 게르만 부족이다. 이후의 통치자들도 카롤루스 가문과의 혈연을 강조해댔는데, 원래 게르만족이 많이 사는 중동부와 달리 프랑스의 기반이 된 서부의 골족 등 피지배 계층과 게르만계 지배계층인 프랑크족은 언어가 달랐을 것이다. 물론 보편어인 라틴어는 수백년 이후까지도 쓰인다. [[파일:Ingres coronation charles vii.jpg|800픽셀]] '''샤를 7세 대관식의 잔 다르크''',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 백년 전쟁(1337-1453)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프랑스 앞에 자신의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나타난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잔 다르크로, 수 차례의 전투에서 영국군을 연파한 뒤 랭스에서 도팽(왕세자) 샤를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 옹립했다. 만약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영국 왕이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을 것이며, 백년 전쟁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파일:다빈치쥬금.jpg|800픽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죽음''',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말년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의 후원을 받았다. 프랑수아 1세는 단연코 가장 유명한 다 빈치 빠돌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수아 1세가 얼마나 그를 좋아했냐면, 그가 그림을 그릴 때 프랑수아 1세가 직접 붓을 가져다 줄 정도였다. 아마 프랑수아 1세의 하인들은 경악을 했을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이 그림은 특히 미술사적으로 상징성이 높은 그림이다. 이탈리아 화가 다 빈치가 프랑스 국왕의 품에서 세상을 떠난 후, 서양미술사의 주도권이 점차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예술하면 이탈리아였는데, 프랑스가 대두될 만큼 중앙집권후 프랑스 정부의 경제적 여유도 커졌다는 반증이다. 다 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유도 프랑수아 1세 덕이다. 프랑수아 1세는 문화적 식견은 뛰어났지만, 대외적으로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 털렸다. 다만 이 때의 패권국가인 신롬 황제 카를5세의 신롬과 스페인 식민제국 영토 판도는 워낙 미쳐돌아가는 수준이라 (첫 서구 세계제국이라고 불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영국의 헨리8세는 이혼도 마음대로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 귀족들이 테르시오를 앞세운 제국군에 하두 많이 썰려가서,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파일:카트린 드 메디시스.jpeg|800픽셀]] '''루브르의 어느 날 아침''', Édouard Debat-Ponsan(1847-1913)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서도 신교도(위그노, 칼뱅파)와 구교도(가톨릭)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결국 이는 위그노 내전과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1572년의 위그노 학살을 묵인한 당시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시신들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일:800px-Assassinat d’Henri IV et arrestation de Ravaillac.jpg|800픽셀]] '''라바이약의 앙리 4세 암살''', Charles-Gustave Housez(1822-1880) 프랑스판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앙리 4세(재위 1589-1610)는 신교도에서 가톨릭교도로 개종한 뒤 프랑스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위그노 내전을 종식시켰다. 종교전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던 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 유럽 역사상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정세는 급격하게 안정되었고 재정과 예술 문화 기술 등 국력이 향상되며 발전을 이끌었으나, 앙리 4세는 1610년 가톨릭 광신도인 라바이약에게 암살당했다. 정치를 대국적으로 해도 암살당하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정치는 사람이 할 것이 못된다. 아니 그보다 미개한 새끼들에게 정치를 대국적으로 펼쳐봤자 좋을게 없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확인된 것만 50여명이 넘는 첩을 거느린 프로게이머(섹스머신)다. [[파일:리슐리외.jpg|800픽셀]] '''리슐리외 추기경''', Philippe de Champaigne(1602-1674) 리슐리외(1585-1642)는 루이 13세(재위 1610-1643) 시대의 프랑스를 이끈 추기경 겸 정치가이다. 소설 삼총사에도 등장한다. 그는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완성시킨 명재상으로 평가받으며, 유럽이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30년 전쟁에 프랑스를 개입시켰다. 즉 신성로마제국내 독일국가들이 종교내전으로 인구가 믹서기처럼 갈려나가는동안 그 세력대치 전쟁상황을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주변국 국력은 약하게 하며 이간질, 프랑스의 국력은 상대적으로 증대시켰다. [[파일:프랑스 최고의 신의 한 수.jpg]] 리슐리외는 프랑스의 엄청난 구국영웅으로 반대세력이 영국에 도움을 받으려는 걸 미리 차단하기 위해 영국 군함이 프랑스 영토로 상륙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항구에다 바리케이트를 엄청나게 쌓아댔는데 이 덕분에 프랑스는 [[지브롤터]] 꼴이 나는 것을 막았다. 이때 리슐리외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등지를 장악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신교도와 손을 잡았다. 프랑스의 국력 강화를 위해 독일을 약화시킬 것을 적극 주장했고, 그의 바람은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그를 매우 증오해 프랑스 침공 당시 그의 무덤을 폭파시키려 했다고 한다. [[파일:피레네 조약.jpg|800픽셀]] '''피레네 조약''', Jacques Laumosnier(1670?-1743) 30년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1635년부터 1659년까지 있었던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은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은 전반적으로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어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 스페인 패권의 몰락,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그림 중앙에서 서로 악수하려는 듯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이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뒷편에 있는 사람이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프랑스 추기경 마자랭, 루이 14세의 모후 안,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리프(아버지 루이 13세를 닮아 동성애를 즐겼다고 한다)이다. 펠리페 4세의 뒷편에 있는 여인이 후에 루이 14세의 왕비가 되는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이다. [[파일:Louis XV Ranc 2.jpg|800픽셀]] '''어린 시절의 루이 15세 초상''', Jean Ranc(1674-1735) 루이 14세는 무려 72년 동안 프랑스를 다스렸기에, 그의 아들과 손자가 자신보다 일찍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재위 1715-1774)가 불과 다섯 살에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여담이지만 루이 15세는 [[파오후 쿰척쿰척]]이었던 자신의 손자 루이 16세와는 다르게 엄청난 미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떡잎이 보인다. 그러나 캐릭터 생성 때 외모에 몰빵한 탓에 반비례해서 국정 능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해외 식민지를 말아먹고 프랑스 혁명과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다. [[파일:8월10일.jpg|650픽셀]] '''8월 10일의 튈르리 궁전 습격''', Jean Duplessis-Bertaux(1747-1819) 프랑스 혁명기에 있었던 1792년 8월 10일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원래 프랑스는 1789년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로의 도주를 꾀한 바렌 배신 사건으로 입헌군주제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결국 이듬해 8월 10일 공화파가 튈르리 궁을 습격하여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사로잡았고, 다음 달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났다. [[파일:아우스터리츠.jpg|800픽셀]]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나폴레옹''', François Gérard(1770-1837)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는 나폴레옹의 가장 큰 군사적 승리로,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격파되자 유럽 전체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군사적 우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파일:Beaume - Napoléon Ier quittant l'île d'Elbe - 1836.jpg|800픽셀]] '''엘바 섬을 탈출하는 나폴레옹''', Joseph Beaume(1796-1885)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그는 엘바 섬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잠시 프랑스의 황제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를 [[쪽국]]과 [[한국]]에서는 백일천하라고 한다. 백일천하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면서 종결되었다. [[파일:paris.jpg]] [[파일:ㅠㅠ.jpg]] '''프랑스 해방군을 보며 눈물흘리는 사람들''' 에펠탑 앞의 남자가 히틀러를 닮았지만 착각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프랑스는 비천한 독일인들한테 점령당했을 리가 없고, 수도 뺏기고 대륙에 위치한 국가가 미개한 섬나라 영국 해적들한테 도와달라고 질질 짰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프랑스인답게 아주 잘 처먹어서 그런지 토실토실하다. 6·25때 삐쩍 마른 헬조선인들 사진 보면 눈물 나온다. 19세기 후반 들어 프랑스 역사화의 제작이 활발했는데, 1870년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인들이 자위하기 위해 '''국뽕주입식 역사교육'''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실상은 크리스티앙 아말비의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교육의 결과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초래했다. 때문에 지금도 많은 프랑스인들은 아직도 됭케르크의 철수는 비열한 영국해적들이 뒷통수를 때려 독일천민들에게 프랑스인들을 내던지고 도주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트라팔가르 해전은 영국이 나폴레옹에게 무릎꿇은 해전으로 기억하며 영국의 트라팔가 광장은 와신상담을 목적으로 만든 광장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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