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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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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도축 == 칭기즈 칸은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전투를 하면 굴복시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모두 다 죽여버리고 목을 벤 뒤 머가리 가죽을 벗겨 그 해골로 해골탑을 쌓았다.''' 이렇게 쌓은 탑은 경관(京觀)이라고 부른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부터 존재했던 매우 오래된 풍습으로 춘추전국 시대 이후로는 [[고구려]]와 [[서진]]이 시행한 바 있었다. 이후 [[당나라]] 들어서는 거의 시행되지 않고 있지만 칭기스 칸 시대에 들어서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렇지만 몽골이 경관을 쌓았던 이유는 몽골 자체가 선진 문물의 도입이 늦었기 때문으로 고대에서도 수많은 국가들이 시행했던 적이 있었기에 크게 잔인하다고 볼수는 없지만 이 광경은 서남아시아~유럽에서는 일절 없었던 광경이기에 엄청난 문화충격을 선사해주었다고 한다. 대충 사망자는 아래와 같다. * 이스파한 80,000명 * 델히 90,000명 * 바그다드 100,000명 다만 위의 경우들은 심하게 뻥튀기 되었다(최소 두배 이상)는 반론도 있는데, 가령 인구 오십만의 도시인데 백만명이 학살당했다라는 주장이 종종 나오기 때문이다. 샤리 골골라에서는 조카 모토칸이 전사했다는 이유로 경관도 쌓지 않고 그 곳의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들, 식물들까지 깡그리 다 죽이고 그 잔해들은 싹다 불로 태워버려 흙으로 돌려보냈고 건물들 역시 죄다 가루로 만들어서 흙으로 돌려보냈다. 가일칸이 칭기즈 칸에게 항복했는데 칭기즈 칸은 전투 중 자신을 고전시켰다는 이유로 가일칸의 얼굴에 난 모든 구멍에 끓는 은을 퍼부어 죽였다. ㄴ 뭔소리야 재물이 탐난답시고 몽골의 사신을 함부로 죽여서 처단 1순위였는데 이 정도로 악명을 떨쳐버렸으니 송나라가 원나라에게 크게 공포에 질림과 동시에 마음 속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 비슷하게 [[서주대학살]]과 같은 학살을 저질렀던 [[조조]]가 갖은 욕을 다 들어먹는 [[샌드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ㄴ 애초에 이방원, 김정은과 더불어 '''형을 살해한 동생'''이다. 칭기즈 칸 더 테무진 생애 첫 살인이 자기 형인 벡테르를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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