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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똥양 특유의 쌀농사 인구부양력 덕분에 당시 [[무굴 제국]]은 역시 쌀농사 인도와 더불어 엄청난 인구수를 자랑했다. ㄴ 어허 감자와 고구마 전래는 왜 빼먹노 조선처럼 상업을 탄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상업은 번성하였다. 박지원이 중국의 엄청난 숫자의 책가게가 있는 걸 보고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 책 가게는 송나라 때부터 많았다. ㄴ 글쎄 탄압은 하지 않았어도 상공업인한테 빼먹은게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그게 탄압아니냐 대표적으로 종이만드는 공장 근로자 감시하고 좀만 수틀리면 공장 에 일못하게 빨간딱지 그어버리고...이거말고도 독점적인 유통망인 소금유통도 중앙정부나 권세가의 힘때문에 소금유통마진보다 이권개입따는 로비비용이 더 많이 들어서 산서상인이 훅갈뻔한 적도 있었지 (출처 : 오느님 명청시대사회경제사 상업, 수공업, 소금) 그러나 산업혁명의 씨가 튼다든지 그런건 보이지 않았다. 청나라 말기 가면 개막장이 되는데, 이는 사실 전성기였던 강건성세에서 기인한다. 강건성세 당시 만주족은 우덜 나라가 너무 잘나간다면서 백성들을 더 편하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세금(인두세)을 조온나 파격적인 수준으로 깎아줬다. 당연히 인구는 폭발했고 이로 인해 19세기부터는 온갖 사회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몇가지만 예시를 들자면, 인구가 존나게 늘었으니 토지집중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유랑민이 늘어난다. 근데 짱깨식 유교 관료제가 제 아무리 우수해봤자 전근대 농업위주 행정체계인지라 유랑민한테는 제대로 세금을 걷을 방법이 없었다. 유랑민은 세금을 안냈기 때문에 안그래도 적게 걷히던 세금은 더 안걷혔다.(청말에 걷은 세금이 겨우 좆본의 2배 수준이었다.<ref>바쿠후만 친거긴한데, 다이묘들 다 치면 청 지방 관리놈들이 빼돌리던 것도 계산해야한다. 청관리가 다이묘만큼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여튼 애매하다. 그러니까 걍 뺌</ref> 인구는 10배, GDP는 4배) 이렇게 세금이 후달리자 지주들한테 지세 걷고 관리들 월급을 깠는데 당연히 역효과가 났다. 지주들이랑 관리들이 병신도 아니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을까?(덤으로 당시의 관료는 99% 지주 출신이었다) 당연히 농민들을 더 수탈해서 청은 더더욱 씹창이 난다. ㄴ 참고로 관리새끼들만 욕할 수는 없는게, 당시 관리들은 뇌물 안받고는 생계유지가 곤란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7급 공무원은 8급 공무원한테 뇌물을 요구했고 8급은 갓급한테 뇌물을 요구하면 갓급은 농민들 삥듣던게 당시 시대상이 되었다. 백련교난 시절에는 청렴한 관리가 생계 유지가 안되어서 딸을 파는 사례도 있었다.(이건 말이 좋아 청렴이지 걍 병신인듯) 상황이 이러면 당연히 세금, 봉급 제도를 정상화해야했지만 청은 청렴결백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괴즐나사]]를 요구한거다.(사실 전근대 국가에선 흔히 보이는 상황이긴하다)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 청의 1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떨어졌다하는데 조선도 이때 세도정치니 뭐니 하면서 병신국가였던걸 생각하면 걍 개막장이었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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