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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교리에 따른 문제 분석 == {{나무위키}} {{인용문|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복음|마태오의 복음서]] 22장 21-23절}} {{인용문|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ref>여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ref>. 그를 보고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마태복음|마태오의 복음서]] 22장 11-13절}} === [[가톨릭]], [[정교회]]의 관점 === {{인용문|[[고해성사]]를 모독하는 것. [[모고해]]가 성립되는 경우는 고해자가 고해[[신부(종교)|신부]] 앞에서 죄의 고백을 할 때 기억에 떠오르는 사죄(死罪)들 중 어느 것을 고의로 숨기거나 사죄의 종류 혹은 회수를 은폐할 때, 그리고 사죄의 어느 것에 대하여 하등통회조차 하지 않고 고백할 때이다. 모고해의 결과 고해자의 죄의 고백과 고해신부의 사죄(赦罪)는 모두 효력이 없으며 고해자는 독성죄(瀆聖罪)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해자는 다시 온전한 고해를 해야 할 뿐 아니라 독성죄까지 통회하고 고백해야 한다.|[[가톨릭]]대사전, <모고해> 항목}} {{인용문|모고해란 [[고해성사]]를 모독하는 경우나, 죄를 고의로 은폐시키거나, 중죄의 경우 불완전한 뉘우침(하등 통회)조차도 하지 않고, 고해 성사를 보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음에 다시 고백해야 하며, 모고해 사실도 말해야 한다.|천주교 용어사전, <모고해> 항목}}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자신이 저지른 죄를 완전하고 깨끗하게 씻을 수는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적절한 보속을 통해서 죄로 인한 벌을 현세에서 감경, 혹은 보속이 죄에 비교해 충분히 컸다면 완전히 탕감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도 간단하며, 단지 [[사제]]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깊이깊이 반성하며 다시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 사실대로 고백하고, 사제가 내린 보속을 충실히 하는 것. 하지만 이들 보편교회에서는 이 항목과 같은 미친 소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제대로 된 반성 없이 [[고해성사]]를 보는 자들'을 '[[모고해]]'라고 하여서 '고해성사, 나아가 [[신성모독|하느님을 모독하는 대죄]]'로 본다. 당연히 죄가 씻어지기는 커녕, 죄가 더 깊어지는 역효과가 난다. 인터뷰에서 말하는 태도를 볼 때, 이미 "죽이고 회개하면 된다"라는 마음가짐이고, 이건 빼도박도 못 하는 모고해에 속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회개 <ref>통회나 회개 자체가 그런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기로 뼈아프게 뉘우치고(痛悔) 뉘우쳐서 마음가짐을 바꾼다(悔改)는 뜻이라 그냥 잘못했습니다~ 하고는 차원이 다른 반성이다.</ref>에 대한 죄사함은 죄를 맘대로 짓고 입에 발린 반성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용서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이기에 통회 및 고해를 하면 보속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나,<ref>살인 자체에 대해서 꺼림칙한 태도를 취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이 왔을때 그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 역시도 당연히 전제되어야 한다.</ref> 계획적인 살인에 더해 "죄는 짓고 회개는 하면 그만"이라는 발상에 [[사제]]들이 괘씸죄까지 보속시킬 가능성이 높다. 설령 진심으로 고해했다 하더라도, 살인이라는 대죄에 대한 보속은 [[성경]] 73권(신약+제2경전을 포함한 구약) 전체 필사과제 쯤은 애들 장난일 정도로 무거울 것임에 분명하다. <ref>참고로 한국은 범죄를 신고하지 않았다 해서 그 또한 범죄가 되지는 않으며, [[고해성사]]를 듣는 [[사제]]는 오히려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직종에 들어간다. 범죄 사실이 비밀유지 대상은 아니긴 하다만 아무튼 고해성사를 받고 범인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그게 법적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 생긴다면 사제가 자수를 강력하게 권하긴 하겠지만.</ref> === [[개신교]]의 관점 === {{인용문|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그 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정욕의 여러 가지 억제를 외부로 나오지 않게 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제3조}} {{인용문|누구든지 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회개했다고 해서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죄 하나하나에 대해서 일일이 회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시 19:13, 눅 19:8, 딤전 1:13, 15). 각자는 죄의 용서를 얻도록 기도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사적으로 고백을 해야 한다(시 51:45, 7, 9, 14, 32:56). 그렇게 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게 되며 또한 죄를 버림으로써 자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잠 28:13, 요일 1:9). 그러므로 '''형제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걸림돌이 된 사람은 사적으로든지 공적으로든지 자기의 죄에 대하여 고백하고 슬퍼함으로써 상처를 입은 자에게 자기의 회개를 표하도록 해야 한다'''(약 5:16, 눅 17:34, 수 7:19, 시 51편 전체). 상처를 입은 사람은 이 회개를 통하여 화목케 되고 그를 사랑으로써 용납해 주어야 한다(고후 2:8, 갈 6:12).|[[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5장 <ref>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홈페이지에서 발췌[[http://kapc.org/law_2]]</ref>}} 이번에는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를 두고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식 구원론을 한국 근본주의 개독들이 함부로 남용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남용도 남용이지만 구원론에 대한 자의적 왜곡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예수천국 불신지옥]] 교리와 엮어서 비판하기도 하는데, 효과적인 비판을 위해서는 기독론보다는 구원론의 측면에서 접근함이 적절하다. 어쨌든 개신교의 입장에서 얼핏 보기에는 마치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을 뿐, 솔직히 옳은 말이지 않은가" 식의 반응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죄는 씻을 수 있다는 이 헛소리에 담겨 있는 구원론은 '''근본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잡탕식 구원론'''이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일례로 [[침례교]] 신학자인 신광은은 [[한국의 개신교]]에 만연한 구원론을 분석한 바 있는데 <ref>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2014. 단 이 사례를 분석한 저술은 아니다. </ref>이것은 위의 망언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에 따르면, 개신교 구원론의 두 축을 이루는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부적절한 야합'''이 문제라는 것이다. 참고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아직까지도 상충관계에 있으며 두 교리 사이의 충돌은 현재진행형이다. * '''알미니안주의'''<ref>[[신학/개신교|개신교 신학]]에서, 구원에 있어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중시하는 학설. ~~[[감리교]], [[성결교]]와 [[성공회]] 일부가 이쪽이다.~~ 현재 개신교 신학 양대 축 중 하나인 웨슬리안 계통의 교파들의 신학은 아르미니우스파 신학과는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웨슬리의 선재은총론과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다. 실제로 알미니안주의는 개신교 교파들 내에서 매우 극소수이다. 현재 개신교 교파들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루터의 [[이신칭의]]론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해석을 다르게 하는 것인데 아르미니우스파는 애초에 이신칭의 자체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ref>:내가 내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도중에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 '''[[장 칼뱅|칼뱅주의]]'''<ref> 개신교 신학에서, 구원에 있어 절대자의 주권적 권한을 중시하는 학설. 장로교와 성공회 일부가 이쪽이다.</ref>: [[야훼|신]]은 나의 구원을 끝까지 결코 취소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나를 구원하지 않았을 위험이 있다. 여기서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 두 교파의 교리에서 신자들이 듣기 좋고 입맛에 딱 맞는 부분만 이렇게 쏙쏙 끄집어내어, 그 둘을 한데 합쳐 버림으로써, 편의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교리라기보다는 비즈니스에 가까운 마케팅용 잡탕을 만들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즉, 제대로 된 알미니안주의자는 범인 이씨의 죄에 대하여 '''구원의 상실'''을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며, 제대로 된 칼뱅주의자는 범인 이씨의 죄에 대하여 '''주권적 유기'''를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칼뱅주의자는 타인의 선택유기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행실 속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게 된다고 추정한다. 즉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죄를 진심으로 애통해하고 그 죄로 인해 고통받게 될 것인데 이 행동은 그렇지 않으니 '당신은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라고 경고한다는 뜻이다. 단, 현재 이 문서에서는 알미니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양대 축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따졌을 때 좀 어폐가 있다. 현대 개신교 교파들 창시의 기본 토대가 되는 루터의 [[이신칭의]]론은 대다수의 교파가 신앙의 근본으로 고백하는데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은 이 이신칭의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아르미니우스파는 개신교에서 매우 극소수이다. 알미니안주의보다는 웨슬리안주의가 칼뱅주의에 대응하는 양대 축으로 더 알맞다. 웨슬리가 알미니안주의에 영향을 일정 부분 받긴 했으나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웨슬리는 하느님의 선재은총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의 성화를 논했을 뿐이고 그 역시 기본적으로 루터의 이신칭의론은 베이스로 깔고 들어갔다. 그는 그저 칼뱅파 일부의 극단적인 이중예정설에 반기를 들고, 인간이 성화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지 이신칭의에 위배되는 구원의 취소 같은 것을 주장한 적이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교회 내에서의 신앙 활동(성사 등), 선행 등을 통해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된다는 의화교리를 갖고 있는 그 [[가톨릭]] 조차도 신인협력이나 구원의 취소를 그렇게 쉽게 논하지는 않는다.<ref>가톨릭 교리상으로는 대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통한 회개의 과정이 없다면 하느님 은총으로 받은 의를 상실하여 구원이 취소될 수 있기는 하다. 이 부분이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개신교 측에는 행위구원론으로 비판받는 부분이다. </ref>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 역시도 구원을 논할 때 1순위가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구원관은 웨슬리안과 알미니안의 사이에 있다고 보면 된다. ~~확실한 건 정교회, 가톨릭, 칼뱅주의, 웨슬리안, 알미니안 등 어느 관점에서도 [[펠라기우스]] 이 놈의 자력구원설은 개소리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개신교인이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나올 게 아니라 "제가 [[야훼|하늘]]과 [[사회|땅]]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정도의 고백이 나왔어야 하지만, 그렇게 개념이 박힌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짓거리를 했을지는... 어쨌든, 어느 쪽 교리를 근거로 하든 저 자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오히려 엄격한 개신교 교리에 입각하면 저 발언으로 오히려 죄를 더 쌓았을 가능성이 한없이 높다. 만일 종교재판이 있던 시절이었으면 신성모독과 [[이단]]으로 즉시 엄중한 처벌이 나왔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개신교나 여느 기독교 교파의 관점에서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이다. 범인이 자살을 하지 못한 것은 [[십계명]] 중의 '살인하지 말라'를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자신을 '살인'하는 것이므로)<ref>하지만 대다수의 소심한 사람들처럼 실행할 용기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ref>하지만 범인은 자신의 자식들을 살해하였다. 기독교 교리상 아이들은 돌보아야 할 존재들, 즉 지켜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피의자는 자기 자식들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도박, 빚, 갈취 등 범행을 하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에 철저히 금지되는 짓들을 저질렀다. 최종적으로 단결짓자면, 여느 보통 개신교인이나 기독교 교파에 소속된 신앙인들이 하지 않을 짓을 저지른 것이다. 범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교리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다. 그는 아마도 교회에 나가기만 하는 신자였을 것이고,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했다. 이리하여 저속한 교리에 대한 지식, 낮은 이해도, 그리고 오직 자살만은 안 했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은 그를 좋은 결과로 이끌지 않았으며, 구원마저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신자라고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 즉 살인을 포함한 모든 죄를 저지르지 않고 예수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를 아이들을 귀중하고 소중히 여겼다. 예수는 누구든지 어린이 한명이라도 죄를 짓게 하거나 불행하게 한다면 차라리 맷돌을 발에 걸어 바다의 빠지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범인이 살인을 저질렀어도 그저 자살만 안 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 교리를 모르는 것이다. === 결론 === 기독교적 도덕율을 이유로 자살할 수는 없었다고 말하던 <ref>애초에 기독교에서 자살이 안되는 이유가 자살을 스스로에 대한 살인과 동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ref> 이 씨가 정작 기독교적 도덕율에 절대로 어긋나는 살인(그것도 자기 자식에 대한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이 모순이 아니냐고 묻는 기자에게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식의 뻔뻔한 대답을 한 것을 보면, 그러한 모순적인 태도가 황당하고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함은 물론 기독교적 죄사함을 멋대로 범죄를 저지른 후 도피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나 도피처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은 분명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자살은 그래도 자기 하나 죽고 말지 살인은 남을 죽이는 거다. 어느 쪽이 더 안 좋은 건지는 명명백백하다. 아무리 흉악하고 큰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경우 신앙을 통해 죄사함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 중 하나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의 교리와 입장에 따라 볼 때 이 사건의 범인 이 씨에게 구원의 여지가 없다, 즉 "죄를 씻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의 교리는 죄를 씻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철저히 반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양심에 달린 문제이고, 개신교를 기준으로 보건, ([[고해성사]]라는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는) 공교회의 입장에서 보건 타인은 알기 어려운 문제이다. 애초에 기독교적 기준에서 죄를 사한다는 것은 신의 몫이지, 인간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신앙 내에서 어떤 죄든 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ref>사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던지 신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것을 씻을 수 있다는 것.</ref> 그리고 이 사건의 범인 이 씨가 정말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지, 그의 말대로 신에게서 용서받아 씻어졌는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이는 신이 판단할 문제이지, 사람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ref>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구원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권리는 신에게 있으며, 인간은 신앙을 행할 뿐이라는 기독교 교리상의 정의(Definition)이다.</ref>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도 [[야훼|하느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는 존재이며, 저런 위선적인 뜻을 가지고 마음에도 없는 회개를 하는 것에 대해 곧이곧대로 듣고 죄를 용서해 줄 만큼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 당장 복음서에서 바리사이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에게서 독사의 새끼들이란 쌍욕까지 먹으면서 [[예수의 성전 정화|강한 질타를 받았는지]] 생각해보자. 이들은 세간에서 보기에는 매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다. 물론 기독교 교리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그저 자신의 행위를 '종교의 힘으로 씻을 수 있다'라고 핑계치려는 망언으로 밖에 들릴 수밖에 없다. [[내로남불]]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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