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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차관(次官)이었을까?=== 이 협약에 따라 이뤄진 통치를 흔히 '차관정치'라고 부르는데 이는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 자리를 일본인들로 채워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서 학창 시절에 역사 교과서 좀 읽어봤다면 다들 한 번쯤은 왜 장관(長官)이 아니라 차관 자리에 앉혔는지 호기심과 의문이 한 번은 생길 만하다. 부처(部處) 업무의 최종 책임자는 결국 장관인데 왜 이런 수고를 했을까? 라고 말이다. *'''선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정무의 최종 책임을 대한제국 정부에게 '양도'하면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고, 이는 조선 백셩들의 일본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리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웬만하면 언론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심각한 역알못들은 대한제국 때 언론이 있었냐는 얘기를 하는데, 한성순보(1883~1884)<ref>순한문, 박문국이라는 곳에서 최초로 발행한 근대 신문으로 정부의 개화 정책을 홍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사실상 관보.</ref>, 한성주보(1886~1888)<ref>국한문 혼용, 박문국에서 매주 발행했으며 최초로 상업 광고가 실렸다.</ref>, 독립신문(1896~1899)<ref>한글판과 영문판 병존, [[서재필]]이 정부 지원 받고 창간한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의병 활동을 폭도들이라고 비판한 흑역사가 있다.</ref>, 제국신문(1898~1910)<ref>한글, 이종일이 발행했으며 싱먼 리가 주필로 있었다. 부녀자를 주된 독자층으로 삼았다.</ref>, 황성신문(1898~1910)<ref>국한문 혼용, 남궁억이 발행한 것으로, 유림을 주된 독자층으로 삼았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제국 신문과 마찬가지로 의병들을 폭도로 매도한 흑역사가 있다.</ref>, 대한매일신보(1904~1910)<ref>한글, 영문, 국한문 세 가지 버전이 있었다.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운영했으며 의병 활동에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지원했으며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했다.</ref>, 만세보(1906~1907)<ref>국한문, 천도교에서 발행한 기관지</ref>, 경향신문(1906~1910)<ref>한글, 천주교에서 발행한 기관지로, 지금 존재하는 경향신문과는 이름만 같을 뿐, 그냥 다른 언론사라고 보면 된다.</ref> 등의 국내 언론과 해조신문(1908, 연해주)와 신한민보(1909, 미국) 등의 국외에 둔 언론들이 있었다. 이 신문 이름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때 한 문제 정도는 나오므로 외워두면 좋다. 근데 발행한 연도 순으로 순서 맞추기 문제 내는 학교 슨상은 죽창으로 찔러도 좋다. 정부가 똥을 싸면 1차적으로 십자포화를 맞는 것은 장관<ref>당시 직급의 명칭은 대신(大臣)</ref> 이고 그 다음은 행정부의 머튽님이다. 차관은 실수를 하더라도 조직 내부에서 내리갈굼 선에서 끝나지, 여론에게 욕을 먹지는 않는다. 차관을 자기네 사람들로 채운다고? [[최순실 게이트|이거 완전...]]{{심플/읍읍}}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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