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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좌우 간의 통수권 갈등 ===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 군대는 주로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사회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다. 민족주의 우파인 대한독립군단이 되려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보니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 부대가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도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갈리는데 상하이파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에 위치한 정부인 대한 국민 의회(1919년 3월 설치, 훗날 임시정부에 통합)를 지지했다. 한인 무장 부대들은 극동 공화국의 스보보드니 시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르라며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상하이파는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 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 공화국의 한인부는 대부분 상하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한인 무장 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지만 1921년 2월에 지휘권 행사에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자유대대는 극동 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결국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하이파와 박일리아가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와 오하묵의 편을 들었고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했다. 박일리아 등은 이에 맞서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자기가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했다.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지만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적군이 멋대로 만든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에 계속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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