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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 페리에 의한 개국으로 인해, 일본은 중화의 사대교린질서에서 벗어나 서양근대국제법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그 이후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내부구조 개편을 성공적으로 단행,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게 된 일본이었지만 [[1868년]] 당시 일본은 삼류 후진농업국가에 불과했고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노무노무 많았다. 당시 일본엔 충분한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자본이 축적되어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간이 자체적으로 산업을 육성하기 힘들었고 이에 정부가 나서서 국영 산업을 육성하여 모범을 보인 후 국영기업들을 헐값에 (정부와 커넥션이 있는) 기업가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산업을 육성하였다. 또한 오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해외로 사절단을 대거 보내 구미국가의 기술과 제도를 배우고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은 조슈번과 사츠마번 출신의 무사들이였다고 한다. 최초로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 된 아이템은 실크였다. 1870년경 일본의 실크 생산량은 연 1000톤 수준이었지만, 40년 후에는 약 연 12,000톤을 생산하게 되면서 세계 1위 실크 수출국가가 된다. 일본의 상사들은 점차 영국과 미국 선사들을 따돌리고 대중국 무역에서 우위를 점해갔고, 산업의 쌀인 석탄생산량 증가도 연 두자릿수를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눈부신 국력의 신장을 근거로 일본 제국은 국제적인 세력권 다툼의 장에 뛰어들게 된다. {| class="wikitable collapsible" border="1" align="right" style="margin-left:15px" |- | colspan="12" style="color:red;background-color:#FFB7C5;text-align:center" |[[파일:Japan-war icon.png|left|35px]] '''일본 제국의 전비지출''' [[파일:Finance-coin icon.png|right|35px]] |- ! style="text-align:center" | 전쟁 ! 총 전비지출<ref>[http://www.teikokushoin.co.jp/statistics/history_civics/index06.html 테이코쿠서원 DB]</ref><br/>(A) ! 1년 세금수입<ref>[http://www.mof.go.jp/budget/reference/statistics/data.htm 일본 재무성 DB]</ref><br/>(B) ! A/B |- | style="text-align:center" | 청일전쟁 | style="text-align:center" | 2억 3240만엔 | style="text-align:center" | 1억 1843만엔<br/><small><small>(1895년)</small></small> | style="text-align:center" | 1.96 |- | style="text-align:center" | 러일전쟁 | style="text-align:center" | 18억 2629만엔 | style="text-align:center" | 5억 3525만엔<br/><small><small>(1905년)</small></small> | style="text-align:center" | 3.41 |- | style="text-align:center" | 1차대전 및<br/>시베리아 출병 | style="text-align:center" | 15억 5368만엔 | | |- | style="text-align:center" | 만주사변 | style="text-align:center" | 18억 8338만엔 | | |- | style="text-align:center" | 2차대전(중일전쟁 포함) | style="text-align:center" | 2036억 3634만엔 | | |} === 류큐 === 류큐 왕국은 1609년 [[사츠마]] 번에 의해 복속된 이후로 줄곧 일본의 속국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류큐는 [[청나라]]의 속국이기도 하였다. 새로이 출범한 일본 제국은 류큐의 왕을 류큐의 다이묘로 격하시키고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청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대만 원주민에 의해 류큐 어민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본 본국이 이에 시비를 틀고 대만에 출병하자 쓸데없는 외교문제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았던 청나라가 귀차니즘에 일본의 류큐지배를 용인해버린다. 이에 분개한 류쿠는 독립을 선언하고 죽창을 들었으나 일본에게 진압당하고 결국 류큐를 둘러싸고 대결할 라이벌이 사라진 일본 제국에 의해 류큐 왕실은 후작으로 봉해지고, 류큐 왕국은 폐지되어 오키나와 현이 된다. === 조선 === 쇄국체제를 굳게 유지하던 중국과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중국과 일본의 개방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반서양정책에 의해 쇄국화된 상태였고, 일본은 페리 제독에 의해 개방된 후 한창 근대화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일본]]은 C급전함인 운요호를 보내 조선과 의도적으로 시비를 틀게 한 후 이를 빌미로 강화도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였고, 강화도조약을 맺음으로서 조선을 자주지방인 독립국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중국과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조선은 류큐와는 달리 청나라로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선이 자주지방이 된다는 뜻은, 사대교린질서의 청 속방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므로 청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조선을 잃은 것이다. 반면 일본도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시켜야 일본 본토의 안보를 확신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중국과 일본의 대결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청은 사대교린질서에 입각해 덩저우에 주둔하고 있던 화이군 육영 3,000명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청은 나약한 조선군대를 쉽게 진압하고, 대원군과 회담을 벌였는데, 회담을 벌이던 도중 우장칭은 대원군 납치계획을 완료하였고, 마젠종은 명령조로 사대교린질서를 들먹이며 대원군을 납치하게된다. 그리고 이후에 청이 조선을 보는 시각은 코메디스럽게도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보는 종속국의 위치를 강요했다. 슈펠트 주청미국대사가 하도 사대교린같은 서양에 씨알도 안먹히는 개념을 조약에 삽입하지 말라해서 기존의 사대교린 질서가 아닌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말하는 종속국(식민지)의 위치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후에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가 조선의 자국 주둔군 3000명 중 1500명을 차출해갔다. 이를 호기라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의 개화파 일당을 사주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종-민비세력의 카운터에 의해 조선의 개화파는 쫓겨나고 일본에도 그 불씨가 떨어져 일본 공사관이 반달당하는 사건을 겪게된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건을 외교 테이블로 끌고가 조선으로부터 배상금을 뜯어내고 상시주둔군을 배치할 권리를 획득하는 등 단단히 호구를 잡는 한편, 조선에서 문제를 확장시키길 원치않던 청나라와도 텐진 조약을 체결해 중일간 대결모드는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10년 후 조선에서 동학당이 대거 죽창을 들고 일어나자 버틸수가 없던 고종-민비정권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에 대규모 군세를 파병하였고 조선에 파병된 이들 양국군간 충돌이 일어나 결국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근대국가 일본은 전근대국가인 청나라를 원사이드로 쳐발랐다. 심지어 일본 해군과 전력이 엇비슷했던 청국 해군도 일본 해군에 대패하고 청나라의 주력전함 중 하나였던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나포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조선간의 주종관계를 청산시키고 청나라로부터 2억냥의 배상금과 청의 영토였던 대만, 요동반도, 팽호열도를 삥뜯었다. 이 중 요동반도는 중국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러시아]]가 칭구인 독일,프랑스를 꼬드겨 일본에 압력을 행사해 반강제적으로 중국에 반환시켰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는대신 3000만냥의 배상금을 추가로 획득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요동의 남만주철도가 호시이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적대관계가 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때 일본은 러시아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였고, 러시아도 쓸데없이 동아시아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기에 양측은 조약을 통해 충돌을 완화하고자 했으나 양측간 의견차이로 번번히 키배가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조선왕조의 정치판에서는 일본과 손을 잡은 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민비 라인이 친러노선을 밟았는데, 일본은 후자 파벌이 러시아 세력을 조선에 끌여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조선 내 친러파의 주축인 민비를 제거하였다. 하지만 민비가 죽자 후덜덜해진 고종이 '''아'''라사(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고종은 러시아를 새로운 천조국으로 떠받들고 러시아에 온갖 이권을 퍼주며 러브콜을 열렬히 보내어 일본의 심기를 자극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러한 고종의 러브콜을 쌩까고 고종이 퍼준 이권만 호구잡은채 일본과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여 대조선외교에서 일본과 조정모드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된 고종이 씩씩거리며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자신이 조선의 황제임을 선포함으로 인해 일본과 고종과의 관계도 완화되게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 고종정권의 일관되지 못한 외교정책(박쥐외교)은 일본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에서 온건파가 강경파에 의해 실각하고, 실권을 장악하자, 그들은 어전회의를 열어 만주와 조선을 점령해야 된다는 모험주의적 노선을 주장했고, 그 노선의 일환으로 일본이 탐내고 있던 만주를 군사력으로 점거하고 조선의 용암포를 점령하자 일본은 안보에 중대한 위기가 도래했음을 통감했으나,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고자 만한교환론을 근거로 러일교섭을 벌이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먹고, 러시아는 만주를 먹는다는 구상을 일본측에서 제시했으나, 러시아에서 "좆까, 다쳐먹을거야"하는 바람에 무산이되고, 결국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공이전에 동아시아의 러시아 세력을 분쇄하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뤼순 항에 있던 극동함대를 선제공격함으로 인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불화관계였던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밀어주었다. 왜냐하면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으로 근동에서는 흑해에서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 중동에서는 영국식민지를 통한 중동방어, 극동에서는 일본을 통한 러일전쟁을 지원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 만주철도를 얻고싶어했으나, 러시아가 무작정 만주를 쳐먹는 바람에 그것이 무산될 판이었다. 그래서 일본을 적극 밀어줬다. 일본은 전비의 약 70%를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융자받았다. 반면 러시아는 전비의 약 60%를 독일과 프랑스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았다. [[File:Russo-Japanese war.jpg|thumb|left|300px|한 러일전쟁 만화]] 당시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언론 및 여론은 일본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뒤집고 일본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자 점점 러시아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의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에 대한 대출을 거절하자 러시아는 전쟁 자금줄이 막혀버렸다. 결정적인 사건은 러시아 발트함대의 전멸인데, 이는 영국의 공작이 꽤나 먹혀들었다. 영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에 자금지원을 해주었고, 극동에 함대가 없던 러시아가 발트함대를 동아시아로 파견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요청한 영국항구에서 석탄공급(아마 인도, 중동쯤이라 생각된다.)을 요구했다. 영국은 좆까라고 했고, 발트함대는 마다가스카르까지 가서 석탄을 공급받고 오는동안, 일본은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아르헨티나 소유 군함 두 척을 매입하여 영국 해군의 보호로 대러함대의 전력으로 포함시켰다. 그 이후 지칠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똥송한 동해(혹은 일본해)에서 전멸당한다. 그러나 일본 또한 전비지출을 심각하게 한건 마찬가지라 일본은 봉천 전투와 츠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킨 후 포츠머스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 조약으로 배상금을 뜯어내지 못한덕에 협상단이 일본 국내에서 쌍욕을 먹었지만 그 대신 일본이 원했던 남만주철도를 확보하게 되었고, 부가적으로 남사할린과 조선에서의 세력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러일전쟁 승전 전리품 중 하나인 조선은 1905년 일본의 보호령이 된후(사실 보호는 개뿔),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 세계대전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일본이 우겨댔는데, 초기에는 영국은 웨이하이와 홍콩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참전을 독려했고, 실제 독일에 선전포고한 8월 4일에 일본에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고, 8월 7일에는 일본해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에 준비했다는 듯이 물자, 영국은 일본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었고, 일본의 참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도 중립을 선언하고, 독일도 자오저우만을 일단 중국에 반환할 것을 밝혔는데, 이렇게 되자 가토 외상은 전쟁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영국에 요청한다. 이에 영국은 전투 지역을 일본의 해상무역 보호에 필요한 지역에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참전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제한을 수용할리가 없었다.<ref>-세계외교사, 김용구 지음-</ref> 독일령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에 21개조를 요구하여 1개조를 제외한 나머지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제국령 태평양 군도들을 할양받고 적백내전에 그 어떤 국가보다 길고 굵게 개입하였다. 그러나 별 소득없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고, 칭다오도 곧 반환되었다. 당시 일본은 온건적인 민주주의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관계도 일방주의보다는 협력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가 일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민권운동가들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민권운동은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어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그 결실을 맺었고 이로 인해 일본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들어선 민주주의 내각은 그 권위가 취약하여 꼰대들의 무시를 한몸에 받았고, 결국 시퍼런 관동군 장교들이 본국 의회를 쌩까고 자기네들끼리 중화민국의 만주를 침략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내각의 사태를 확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명령과 3개 사단의 증원부대 파병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의 정부지시없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었다는데 있다. 관동군은 병력규모상으로 만주의 중국군에 비해 열위에 있었지만 중국군을 영혼까지 털어버리고 1년 만에 만주를 장악하였다. 결국 일본 내각은 불가침, 주권존중의 협정을 중국과 맺게된다. 그 이후 장악한 만주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어쨌든 이들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라 정부를 무시하고 군이 지멋대로 움직이는, 군의 민관통제가 안되는 것이 일본제국의 전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그 입지가 불안불안하던 민주주의 정부는 결국 [[1936년]] 청년장교들의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천황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군부에 큰 인식변화를 일으켜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데 한몫하게 된다. 의회는 비록 존속되긴 했지만, 사실상 군부정권의 들러리가 되고 만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중일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패망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장제스 루트를 끊을 것을 약속받았고, 마쓰오카-앙리 협정으로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 통행이 가능했으나, 군부 병신들이 통킹지역의 진주를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 내각은 제국정책요강에서 소련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지만, 미국이 참전하는 경우 추축국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이었고, 인도차이나를 계속 쳐먹는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것이 실행되자, 미국은 미국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기에 이르렀고, 2차 고노에 내각은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자 친미파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대장을 미국대사로 임명했으며, 헐 국무장관과 교섭을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 순방에서 돌아온 마쓰오카 외상은 지랄하고,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미국과의 협의를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맞짱까자는 나찌적 주장을 했다. 이런 미친놈을 해고하고자 고노에 수상은 총사직하고 3차 고노에 내각을 출범시켰다. 3차 고노에 내각은 도요다 데이지로 해군대장을 외상으로 임명했고, 통제불능한 군부의 남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되자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직접회담을 제의하게 이른다. 한편 히틀러는 일본이 미국과 짝짝꿍하는 것에 항의하였고, 독일이 계속 연합군을 좆바르자 교섭을 중지하였다. 이에 미국은 석유수출 중단과 루즈벨트 직접교섭을 사실상 거부했으며, 이에 일본은 제국국책수행요강을 9월 6일에 발표해 미,영국과의 전쟁준비 및 외교수단으로서 일본의 요구관철에 노력, 그 노력이 무산될 경우 개전을 결정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이에 고노에 내각은 일본정부의 방침을 미 정부에 제시했고, 미국은 헐노트를 전달했다. {{인용문|1.모든 국가의 영토보전 및 주권존중 2.타국의 내정불간섭 3.통상기회균등 4.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태평양 지역에서의 현상변경의 반대 그리고 일본군의 중국주둔이 불법적인 것이라고 인정할 것.}} 이 점에 관해 일본 육군은 존나 빡쳤고, 도조 히데키 육상과 고노에 수상, 도요다 데이지로 외상이 설전을 펼치다가 지친 고노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고노에와 도조는 황족을 수상으로 천거했으나 황족내각 형성에 반대로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된다. 이윽고 군부정권은 구체적인 제국국책수행요령을 결정했고, 그 내용은 추축국과의 제휴강화, 인도차이나는 중일문제 해결시 철병, 미국의 인도차이나 진출 저지 및 미국의 일본 석유공급, 중일문제 불가침을 미국에게 요구한다는 상당히 정신병자적 내용을 결의했다. 그걸 받아든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대사에게 추축국 탈퇴, 인도차이나 철병안하면 뒈진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당연히 도조는 이를 거부하고 진주만을 공격한다. 사실 기습이라고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41년 12월 6일 시게노리 외상이 7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진주만 폭격을 미국에 전달하라는 전문을 주미대사관에 발송했는데, 노무라 대사가 그 문서를 받은 것은 미국시간으로 2시 20분이었다. 그래서 진주만이 기습공격이 된 것이다. 하긴 30분 전에 선전포고하는 병신이 어디 있냐? 그리고는 자신들과 비슷한 집단인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휘젓다가 결국 대규모 공습과 원폭투하로 인해 항복하고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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