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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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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전술 === 이순신은 16세기 당시까지 세계 어디에서도 없던 수준 높은 군사적 전략 전술을 발휘한다. [[포위섬멸전]]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학익진 전술은, 일반적인 학익진이 아니었다. 후퇴하는 척 하다가 180도 선회, 반전하며 적을 포위하는 것은 대단한 훈련과 기술, 지휘 통제가 없다면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16세기 말부터, 서양사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해전의 양상이 바뀐 시기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동서를 막론하고 해전이라면 '충각+도선+백병전'으로 끝장내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화약과 화포가 발전하면서 멀리 있는 배를 화포로 박살내고 잔여의 적을 정리하는 형태로 서양의 해전 트렌드가 바뀌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 이런 전술을 쓴거다. 이순신이 이런 서양의 트렌드를 알아서 그랬을까?? 아니다. 서양이야 해양쪽으로 워낙 난리 치다보니 연구한거겠지만 조선은 그런 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다. 그런 트렌드가 전래되려면 못해도 백년은 걸린다. 거리문제도 있고 실제 이랬다더라 들었다 한들 실험해보고 하는 시간이 엄청났을 것이다. 이순신은 화약과 화포가 발전하는 양상을 선구적으로 해전에 응용한 거다. 또한 명중률이 낮던 당시 화포를 개량하려는 노력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고, 군사훈련에 심혈을 기울인 모습을 통해 해전의 신, 나아가 적들에게 있어 자연재해로까지 보이는 불패신화를 만들었다. ㄴ사실 조선수군이건, 왜선이건 서로가 화약(화포/조총)을 쓰기도 하지만, 나무로 만드는 배다 보니까 화공이 어느쪽이든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화포로 방패들을 깨부수면서 왜군들을 헤집으면서 화공을 갈기고, 여기에 불을 끈다고 노출이 되는 왜군들을 다시 화포와 화살로 쏴버리면 매우 효과적인셈이다. 대신에 군사들 입장에서는 저기 수급이 둥둥 떠내려간다고 입맛다시겠지만. 또한, 상당수의 전투에서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에 비해 숫적으로 매우 부족하여 불리한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 정립된 란체스터 법칙에 따르면 전투 시 약간의 숫적 불리함도 치명적인 단점이 되어버린다. 이순신은 이때문에 기발한 전략 전술과 [[기습]] 공격, 그리고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 함선과 화력을 집중 투입하여 전체적인 숫적 불리함을 극복해낸다. 예를 들어 10척으로 적 20척과 싸운다면, 적의 20척이 한 번에 전선에 나서지 못할 상황을 만들고, 아군 10척으로 소수의 적을 차례로 압도, 수색 섬멸 작전으로 축차소모시켰다. (물론 [[명량 해전]]처럼 집중할 화력조차 전무한, 제대로 된 전략 전술의 실행이 불가능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은 승리했다. 이건 '뛰어난 전략 전술' 정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해낸 것이기에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순신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f>실제로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에 승리한것은 하늘이 내린 행운이라 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전투였다</ref>) 가끔 혐한, 일뽕 파오후들은 보급선이나 털어먹은 겁쟁이라고 병신승리를 하고는 하는데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숫자가 많은 일본군을 얼마나 처참하게 팼는지 모르는 능지를 지녀서 그렇다.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는 학익진 다구리에 미역 먹으며 버텨야 했고 구루시마는 12척 상대하다 목따였고, 전국시대 명장이라는 시마즈까지 이순신 작전에 걸려들어서 일방적으로 털리다가 대장선 침몰하고 물에 떠다니다 목따일 뻔했다. 거기다 이순신은 본진 지원도 못받은 채로 멀티 하나에 의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적은 병력으로 최고의 효율을 유지하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무능한 본진에 지원 물자를 보내기 까지 하였다.<ref>난중일기에 따르면 비변사에서 공문이 내려와 '종이'를 보내라고 했다 한다. 충무공께선 종이를 보내긴 하는데 짊어지고 갈 사람이 너무 힘들겠어서 우선 이것만 보내야겠다고 기록하신 바 있다. 전쟁 전반을 지휘해야 할 비변사라는 최고 기관이 가장 후방에 앉아서, 최전방 야전의 장군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종이 좀 보내라'인건 코메디인데, 종이를 보내며 지고가는 사람이 너무 무겁겠다며 걱정한 충무공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참 웃프다.(이 망할 비변사 새끼들, 즉 당시 조선 조정은 충무공껜 쌀 한 톨 지원안해 준건 충격과 공포라 할만 하다. 그래놓곤 원균한테는....암튼 비변사는 맨날 뭐 좀 보내달라고 했다. 실록에도 선조가 '전라도에서 온 종이'를 육군에 나눠주고 종이옷-비옷 정도로 쓰이는 지의를 말함-을 만들어 입히라 한 기록이 있는데 충무공이 보낸 종이인지는 불분명하나 아마 맞을 것이다.) 충무공도 장계에서 '조선이 그나마 폼이나마 나라랍시고 유지하고 있는건 전라도가 아직 갠츈해서 글코요, 이건 오로지 수군의 힘임요'라고 쓰신 바 있다. 그리고 뭐 하나 좀 보내달라고 요청하신 일이 없고 다만 수영에 이질이 돌아 수군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자 '의사 좀 파견해 주세요' 라고 요청한 것이 다다. 조선수군은 전투에서의 사망보다 굶어죽은 아사와 이질로 인한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 피난을 좌수영으로 오는 백성들이 늘어서 '무인도 하나에 피난민을 정착시켜서 농사짓게하고 군량도 걷으면 어떨까요?'하고 장계하기도 하셨는데, 그 전란중에, 그 당연한 일까지 임금의 허락을 구하는 모습을 보면 충무공은 진정 유자(儒者)셨다.</ref>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부산포 얻어 터지고 이순신 털려고 공격했다가 역으로 대판 털린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가진건 있는데 눈뜨고 당하고 역으로 털리는 놈이 병신이지ㅋㅋㅋ 당장 해전이 아니라 롤이나 스타 같은 게임만 보더라도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명장을 만드는 대단한 판단력의 결과물이다. 이거 못해서 유리한 상황에서 꼬라박고 지는 경우가 한두번 있는것도 아니고.. 이걸 그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 겁쟁이네 하는 건 빡대가리 새끼들이나 들고 나올 논리<ref>이런 논리로 충무공을 까는 아이들에겐 손자병법을 읽어보길 권한다. 충무공을 까려면 사실 기본적인 밀리터리 지식은 있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수 없는 분임을 명심해라. 까려고 공부하다가 오히려 충무공 동상만 봐도 절하는 놈이 생겼다 카더라...</ref> 이자 장수에게 할 수 있는 큰 칭찬을 모욕인 줄 알고 하는 짓거리인데 이딴 소리로 갓갓갓 장군을 깎아내리려는걸 보면 혐한이네 일뽕이네 걸려서 헛소리 하고 다니는 애들 대가리 수준도 짐작이 가능하다. 근대 이후의 화약무기와 달리 적 함선을 부수려면 적어도 십여발 이상의 함포를 명중시켜야했고, 숫자는 상당히 열세였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즉, 화력으로 숫자를 무력화시킨 것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란체스터 법칙]]을 수세기 이전에 해전에서 실행한 것으로 대단히 시대를 앞선 것이다. 일본에 비해 조선 해군의 사상자가 극도로 적었던 것도 이런 뛰어난 전략 전술 때문이었다.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으로, 충무공이 그저 [[화포]]빨로 빵야빵야하자 왜군들이 녹아내린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좀 있다. 근데 당시 화포기술상 흔들리는 배 위에서 최대사거리에 있는 적을 정확하게 쏘는건 거의 불가능하며, 함상에서 화포가 높은 명중률을 보이려면 70m이내에는 적이 들어와야 한다. 또한 100m가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명중률이 존나게 급락하기 시작한다. 근데 조총의 사거리는 50m이므로 50~100정도의 거리를 항상 유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설명 안해도 알 것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듯이, 당시 화포는 한방 명중시킨다고 적선을 격침시키는 그런 무기가 아니다. 갑판을 맞춘다고 하더라도 드라마나 영화처럼 포탄이 폭발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적만 죽는다. 쉽게 말해 화포빨 드립은 개소리다. 물론 화포가 전공에 영향을 준거는 맞는데, 화포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상쇄시킨건 순전히 제독의 능력이다. 화포가 그렇게 씹사기 무기라면, 원균은 몰라도 이억기 정도의 능력이었으면, 충무공과 연합 안하고 단독으로 전라우수영 함대 이끌고 왜군을 썰고 다녔어야 했다.<ref>이억기나 무의공(이분도 이름이 이순신;; 당연히 한자는 다르다) 같은 당대의 수군장수들은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동료 중 하나가 God이시니 어쩔 수 없이 좀 급이 떨어져 보인다;;; 매우 안타까운 일.</ref> 게다가 민중사관쪽 병신들은 이순신만의 힘이 아니라고 까내리지만 단지 이순신이 [[원균]]으로 교체되었는데 칠천량해전이 터진 건 해명을 못한다. 원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상병신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그게 지들이 까는 영웅주의 사관론과 뭐가 다른가? 민중도 고생했지... 근데 고생도 이순신 밑에서 했으니 살아남기라도 한거다. 원균 밑에서 하다간 뼈도 못추린다. 민중사관도 좋지만 이런 특이한 경우엔 좀 갖다붙이지 마라. 공부안한거 티난다. <ref>글고 민중사관 님들아... 난중일기 좀 처음부터 끝까지 꼭꼭 열번이상 씹어가며 정독 한 후에 그런 소릴 해라. 그 시절에 그래도 양반인 충무공이 개인적으로 일기를 쓰면서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던 노비며 천민들의 이름은 죄다 기록하셨다. 말그대로 일기에, 남 보여주려고 쓴 글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양반님네 기록들에 이런 천민들 이름 간혹가다 나오기야 하겠지.. 근데 그건 일기가 아니고 그냥 후대에 남기려고, 말그대로 남 보라고 쓴 글이기 때문에 난중일기랑은 차원이 다르다. 어찌보면 충무공이 민중사관의 원형인 분이다. 함께 고생한 민중들 안잊으려고 일기에 적으신 거란 말이다. 그런걸로 충무공 까려면 먼저 난중일기부터 읽고 공부좀 해라. 겁나 빡친다.</ref> 그리고 불멸의 이순신 감독이 말하길, 화포로 적선이 와장창 깨지는게 잘못인지 알지만 보는 맛이 있고, 시원시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거라고 한다. 또 이런 전략 전술을 달성하려면 필연적으로 군대의 정예화가 필수였기 때문에 임지에서 병졸이나 휘하 장교들 졸라 갈궜다. 죄질 안 좋으면 모가지 뎅강. 이거 가지고 이순신 까들이 ㅈㄹㅈㄹ 거리는데, 요즘 헬조선 똥별들처럼 사소한 것까지 흡집 잡아서 갈구기 위해 갈군 게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거라서 부대 엎은 거다. 당시 조선 수군은 실제 전투훈련보다 세금 실어나르는 드랍쉽 질만 하는 등 개판이었고. 실제로 능력은 있지만 게을러서 뺀질거리던 [[김완]] <ref>게을러서 아마 구를때 정말 힘드셨을거라고 생각되는 분이다. 그러나 김완장군은 그때 구르는 바람에 칠천량에서도 살아남아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까지 해서 돌아왔다. 그래서 해소실기 같은 저서를 통해 칠천량 해전에서 대장균의 활약이 어떠했는지를 절절히 남겨주셨다.</ref> 같은 애들도 이런 과정을 통해 발굴해냈다. 구르는 입장에서야 ㅈ같지만 이런 혹독한 단련 덕분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은 전사자보다 비전투손실(질병, 사고 등)이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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