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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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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있는 업적 == 너를 낳으신 부모님께서 디시하는 너를 보면서도 어떻게든 이쁜점을 찾아내듯이 이런 수양 새끼에게도 어떻게든 찾아낼만한 업적이 있긴 하다. 아래는 그 목록 1. 우리나라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처음 편찬했다. ㄴ 단 완성은 지 손자 성종때 완성했다. 고로 역사쌤이 역알못이거나 보충 설명안해주면 세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든걸로 알기쉽다. 게임으로 치면 클로즈 베타 테스트 다끝내고 발매할려고 하는데 수양이 사망. 근데 아들놈도 곧 사망. 그래서 정식 발매는 성종 때 1471년에 한게 된거다. 물론 성종도 만들고 끝이 아니라 최신패치와 확장팩을 내놓긴 해서 1485년에 마무리한다. 2. 조선왕조 500년 기간 중에 불교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다. 이 다음으로 조선조에 불교가 흥성했던 때를 문정왕후 통치 시기로 잡는데 이 당시의 대표 승려였던 보우마저 "불교도에게 있어 조선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라고 팩폭 날리다가 참교육 당할 정도로 조선 500년 내내 불교에 대한 대접이 헬 그 자체이었다. 하여튼 불교 관련해서는 남겨놓은 유물이나 업적 같은게 엄청 많다. 결국 현대의 불교신자들은 조선 왕조의 역사를 읽다보면 세조 시기 외에는 눈 앞이 깜깜해지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3. 위에서도 적었지만 하여튼 후대에 남겨놓은 국뽕 흡입용 유물들은 존나 많다. 귀무덤과 삼전도비를 남겨주신 선좆새끼와 인좆새끼들과는 달리 국보 2호 원각사 십층석탑이나 보물 2호 보신각 종,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장경판전, 유네스코 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 같은 걸 남겼고, 그 외에도 국보나 보물 중에 이 새끼가 남긴게 존나 많다. 특히 장경판전은 세조가 건립 추진 안했으면 고려빠들이 보기만 해도 절정에 달하고 만다는 고려 팔만대장경도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ㄴ 이걸 유교국가의 수장이 남긴 업적으로 보기에는...ㅋ 그저 백성 고혈 빨아다가 헛짓거리 한 셈이다. 지금와서야 뭐 보기좋고 우짜고 유적 유물이라고 하지만 당대 지배층인 유학자들이 보기엔 '우리 왕님이 미쳤나봐요' 수준이다. 팔만대장경이 없어졌을거란 말이 있는데 ㅋ 대장경 판본의 경우 왜구들의 전문 청구물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반야경 같은 것은 일본에 수없이 전해주었고, 대장경은 줘도 줘도 끝도 없이 달라하니... 태종은 '구찮은데 그냥 대장경판을 줘버릴까??' 이런 적이 있었다. 간원들은 '그거 뭐 많으니 줘도 돼죠' 정도로 답했지만 막상 말 꺼낸 태종은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아나 보고 격정하자' 한 후로 말이 없는거 보면 흐지부지 된 듯. 태종같이 억불에 열심이었던 왕도 대장경판 같이 만드는데 공력이 많이 드는 불교유물은 남겨뒀었다. 이걸 굳이 세조의 공적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음?? ㄴㄴ 유교국가의 수장이네 어쩌네 하기전에 그냥 애초에 불교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때려부순놈이 없는데 지킨게 왜 업적이냐...? 그리고 역사는 기본적으로 당대와 후대를 모두 보고 판단하는거다. 4. 앙 한자띠를 외치던 다른 왕들과는 달리 한글을 좋아했다. 석보상절이니 월인석보니 능엄경 한글판이니 이런건 제쳐두더라도 현대 우리가 갓종대왕 갓민정음 하면 젤 먼저 생각나는 구절인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 도 사실 이 새끼 대에 만든 거라고 한다. ㄴ 이건 업적이라고 하기도 그런게 당연히 왕이라면 특수한 경우 빼면 자기 아버지 띄우는게 정상이다. 5. 그 외에 소소하게 청화백자 처음 굽거나 동양 최대 의학서인 의방유취 남기거나 동국통감이나 삼국사절요 같은 거 만들면서 역덕질하거나 우리나라 지도 만들어보거나 했다고 한다. 먹을 거 좋아하는 파오후였는지 산가요록이나 식료찬요 같은 음식책도 최초로 남기게 했다. ㄴ역사서 부분은 세종조에 시작해서 끝 못본걸 지가 끝내서 요란스러운거다. 경국대전스러운 일이랄까. 6. 수양대군이 많이 찾던 사냥터가 현재의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광릉숲인데 이 숲에 수양대군의 묘인 광릉이 세워지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수양대군의 명령대로 이 숲을 꾸준히 보호하였으며 일제강점기때 일본도 이 숲을 보호하였다. 광복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며 87년에 광릉 옆의 포천 쪽에 산림청에 의해 수목원이 세워지는데 이 수목원이 현재의 국립수목원이다. 수목원이 세워진 이후 산림청은 현재에도 이 숲을 보호하고 있다. ㄴ 당시 임금의 사냥은 돈지랄이었다. 활 하나 말 한마리 가지고 돌아다니는게 아니라 병력 엄청 준비하고 사냥터 닦고 그래야했다. 그냥 쳐놀고서 사냥터 만든게 지금 문화유산으로 남았을 뿐이지 이걸 업적이라고는 못한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 지낼려고 직접 음악 작곡하는 개짓거릴 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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