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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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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이후=== [[히틀러|낙지왕]]이 발터 PPK로 죽고 낙지가 항복한 뒤 독일은 4개 연합국의 점령지가 된다. 이때 사민당도 복원되며 해외로 망명한 반나치 투쟁자들(대표적으로 독일 네 번째 총리 [[빌리 브란트]])이 독일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련 점령지(이후 [[동독]])에서는 독일 공산당과 사민당이 합당되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라는 공산권 국가의 집권당이 된다. 서독지역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남아있었지만, 처음 세 번째까지는 총리를 한 명도 내보내지 못한다. 그러나 독일은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시절의 권위주의와 군국주의가 많이 남아 있었고, 나치도 쉬쉬하는 분위기지 지금처럼 반성하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심지어 당시 총리가 나치 출신으로 유명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였고, 이때 마침 프랑스에서 시작된 68운동이 독일에도 확산되며 독일에서 본격적인 과거사 청산과 탈권위주의 분위기가 불게 된다. 이때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 사회 분위기가 겹쳐 본격적인 과거사 청산이 시작된다. 이때 당시 공산권이던 폴란드에 가서 무릎꿇기를 시전하는데, 이때 당시 '일시적'으로 '빼앗긴' 영토에 대해 영구적으로 포기를 선언하자 난리가 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결국 [[독일 재통일]]때에 독일이 더 이상 영토 확장의 야욕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반발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동방정책도 시행하는데, 이는 기존 반공노선에서 반공은 유지하되 긴장을 풀고 유화적으로 나서는 정책이였다. 물론 이 정책도 결국 동구권의 개방을 이끌어내는 정책이고, 자국이 피해를 입으면 얄짤없이 항의했다. 누구처럼 퍼주기만 하는 외교정책이 아니였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의 개인 비서이던 귄터 기욤이 간첩이였다는 게 드러났고, 다행히 국가적인 곳에는 손대지 못한 게 드러났으나 귄터 기욤이 빌리 브란트를 입막음하기 위해 창녀들을 공급하고 빌리 브란트가 묵인하던 게 들통나 빌리 브란트는 더 이상 총리를 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같은 사민당 총리이나 조금 더 중도우익에 가까웠던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가 된다. 이후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독일 통일을 이룬 기민련 총리 [[헬무트 콜]](방금 언급한 사민당 총리랑은 다른 총리이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어 당시 독일의 난리난 경제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다.(하르츠 개혁) 그러나 당장 빛을 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지지를 잃어 기민련의 과학자, 동독 출신인 여성 정치인 하나에게 잠깐 정권 넘겨주고 얼마 안 가 다시 돌려받을 생각으로 넘겨줬는데... 하필 그 사람이 [[앙켈라 메르켈]]이였다. 십수 년이 지나, 메르켈 퇴임 이후 다시 사민당 총리인 [[올라프 숄츠]]가 집권한다. [[분류:독일]] [[분류:사회민주주의]] [[분류: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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