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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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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되자마자 분열과 해체의 위기에 처한다.''' 조선을 일본에서 독립시켜주고 그 대신에 국제 연맹(UN의 전신)이 조선을 통치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위임 통치 청원서를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사건이 있었다. 임정이 세워지자마자 이게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국제 연맹? UN? 괜찮은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당시 국제 사회는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지배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국제 연맹에 가입한 국가들은 식민지 국가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던 주인님 국가였기에 그곳의 회원국들은 일본 제국과 다를 바 없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은 국제 연맹 상임이사국이었고. 말 그대로 주인님 바꿔달라는 소리를 한 것이다. 이 사실에 격분한 무장투쟁 (신채호, 박용만, 이동휘 등) 계열은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승만은 이때도 미국에 있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첫 단추부터 흔들렸던 임정은 1925년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이승만을 탄핵하고 다음 대통령에 박은식을 추대한다. 그러나 노쇠했던 박은식은 대통령 중심제를 의원 내각제로 수정하는 일을 해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하야 하고 곧 운명을 달리했다. 근데 미국에서 일어났던 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의 후폭풍이 상하이에서는 약해졌는지 임시의정원은 기껏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고 이에 제대로 빡친 신채호는 임시의정원에서 뛰쳐나가버렸다. 나중에는 중국 + 만주 +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 vs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노선과 이념에 따른 갈등(사회주의 vs 민족주의)이 극에 달하자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진 민족 대표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당시 민족 대표들은 해체하고 연해주로 옮기자는 창조파(여운형 대표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신채호), 구조 조정만 하는 선에서 끝내자는 개조파(이동휘 대표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안창호), 분열만 더 심각하게 만드는 회의를 멈추고 그냥 그대로 가자는 현상유지파(조소앙, 김구)로 나뉘었다. 회의가 5개월 동안 70여 차례에 걸쳐서 이뤄진 결과 창조파가 나중에 주도권을 잡지만 자금난과 현상유지파의 반대에 부딪혀서 그냥 흐지부지 끝나면서 개조파와 창조파가 임정에서 나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현상유지파의 일원인 김구가 임정을 끌어안게 되었다. 활동과 성과가 미약해지면서 안 그래도 없는 사람이 계속해서 빠지니 임정은 규모가 나날이 초라해지고 위기를 맞이한다. 초창기에 수천 명에 달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대부분 빠져나가면서 100명도 채 안 남았으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 바뀌고, 임정의 외교적 성과는 지지부진하고, 재정난까지 오면서 이에 견디지 못한 몇몇(대표적으로 춘원 이광수)은 크게 실망하여 친일파로 흑화하고 국내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연통제와 교통국도 사실상 파괴되면서 임정의 암흑기가 왔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보내서 임정 요인들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등을 감행하거나 조선총독부에 잠입하여 자료를 빼돌리는 임무를 수행하던 임정 스파이들에게 코렁탕을 선사하는 등의 공작을 펼쳤고 덕분에 안 그래도 없는 사람들이 더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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