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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조선 ~ 고려=== 이 시기에는 해류도 달랐고 동아시아 북부 지역의 기후가 지금보다 따뜻했기 때문에 상당히 살기 좋았다고 한다. [[고조선]]의 영토였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원삼국 시대에 [[원산시|원산]] 이남으로는 [[동예]]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옥저]]가 있었지만 일찍이 [[고구려]]의 셔틀 노릇<ref>진작부터 고구려에 병합 당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ref> 을 하다가 결국 [[고구려]]에 흡수됐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가 남경남해부(함경도 해안), 동경용원부([[육진]]), 서경압록부(갑산), 중경현덕부(무산. 현덕부의 중심지인 화룡이 강 건너에 있다.)를 설치했다. [[발해]]가 [[거란]]에게 털려서 망한 뒤 거란 놈들은 발해 수도가 있던 닝안에 동란국을 세웠는데, 중경현덕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함경도 지역은 동란국 조까를 외치며 거란에게 미친듯이 죽창을 들었다. 하지만 이 죽창은 정안국이 털리고 나서 싸그리 다 진압되고 남해부는 [[요령성]] 안산 시 하이청<ref>남해부를 하이청으로 옮기고 해주 남해군 설치</ref>, 현덕부는 요령성 진저우 베이전 시<ref>요령으로 옮긴 뒤 현주 봉선군 설치</ref>, 용원부는 요령성 단둥 펑청 시<ref>동경용원부를 여기로 옮긴 뒤에 개주 진국군 설치</ref> 로 강제 이주되면서 망했고 수많은 [[여진족]]들이 함경도를 점령했다. 그나마 거란이 먹은 요동과 가까운 [[평안도]] 여진족들은 [[숙여진]]이었는데 이들은 전부 [[생여진]]이라서 완전 지들 마이웨이를 걸었다. 고려와 전쟁한 생여진은 이들 중 이 지역에 정착한 갈라전에 속한 친구들이었다. 그나마 고려가 함흥~성진 일대까지 [[동북 9성]]을 세워서 먹어보려고 했지만 실패. 그래도 동북 9성 축조 이래 수많은 고려인들이 지속적으로 함경도로 진출했으니 완전 실패한 건 아니었다. 결국 [[갑산군|갑산]], [[길주군|길주]]까지 진출했다. 경상도가 영향을 줬니 뭐니 하는데 이게 좆문가들이나 털 개소리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조선 왕조=== {{지역감정}} {{인용문|함경도는 니전투구(泥田鬪狗,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정도전]]}} ㄴ 참고로 이 말을 들은 [[태조(조선)|리성계]]가 "왜 우덜 지역을 [[개]]로 평가함둥?" 이러면서 [[피꺼솟]] 하자 [[정도전]]이 황급히 말을 바꿔서 석전경우(石田耕牛)라고 돌밭을 가는 [[소 (동물)|소]]라고 평가하자 그나마 안심했다고 한다. ㄴ '함경도'가 처음으로 사용된 게 예종 즉위년(1468년)이다. 태조 때는 별다른 이름 없이 그냥 동북면이라고 불렀다. 솔직히 그때도 함경도라고 불렀을지는 의문을 가져보는 게 좋다. 말이 나온 김에 이름의 변천사를 살짝 소개하자면, 처음으로 도 이름이 생긴 것은 1413년의 일로, 이때는 '영길도'였는데 10년 전 조사의의 난이 문득 생각이라도 난 건지 1416년에는 영흥부가 화주목으로 강등당하면서 '함길도'로 바뀌었다. 근데 이후 이시애의 난이 터지면서 길주도 길성으로 강등당했고 이로 인하여 오늘날의 '함경도'가 처음으로 생겼다. 이듬해 예종 1년(1469년)에 함흥에서도 반란이 생기면서 관찰사가 피 보는 일이 생기자 함흥을 떼어내고 영안도로 개칭, 그러다가 중종 4년(1509년) 함흥 명예 회복을 통해 오늘날의 함경도라는 이름이 비로소 정착한다. {{인용문|태조의 [[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는 명 때문에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없으며 혹 벼슬에 오른 자가 있어도 현령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택리지}} ㄴ 리성계는 함경도 출신인데 그런 놈이 [[셀프디스]] 했던 셈이다. 게다가 개국 공신들 중에 서북([[평안도]], 함경도) 출신 장수들이 많았는데도... ㄴ 자기 같은 놈이 또 나올까봐 서북 사람들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절대 요직에 앉히지 말라고 명령했을 수도 있다. 수양대군 같은 새끼가 실제로 튀어나오기도 했고. {{인용문|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요하게 여겨 사대부는 [[평안도]], 함경도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삼지 않는다.|택리지}} {{인용문|북쪽의 두 도([[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왕조|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들은 매우 적고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그들을 [[조선 왕조]]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샤를르 달레의 조선 교회사}}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인식이 이렇게 시궁창이었고 [[조사의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등을 거치면서 이미지는 바닥을 쳤다. 그 뒤로는 지하 자원 빼면 볼 게 없는 척박한 땅이라고 좆미개 취급 받게 된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애초에 조선 정부에서 함경도 보고 "야 니네 농사도 안되는 좆 쓰레기 땅(천연 자원의 존재는 다들 몰랐다.)인데 상업이나 발전시켜서 먹고 살아라"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답 없는 놈들이나 중죄인들은 [[함경도]]로 유배를 존나 많이 보냈다. 레알 답이 없는 것들은 [[삼수군]]이나 [[갑산군]] 같은 씹헬동네에 유배 보내서 [[삼수갑산]]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고 윤선도는 [[회령군]]으로 유배를 간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인용문|신사적 기호, 비열한 서북. [[지역감정]] 하나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윤치호]]}} {{인용문|[[안창호]] 曰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 동안 적이기 때문에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윤치호]] 일기}} ㄴ 다만 이건 사실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그만큼 지역감정이 심했다는 상황일 수도 있지만. 이때도 인식은 여전히 시궁창이었지만 산업이 발전해서 상대적으로 잘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남쪽에서는 [[조선 왕조]]가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중화사상]]에 빠진 [[유교탈레반]]들이 [[만동묘]]를 만들고 [[정신승리|정신 딸딸이]]나 칠 때 [[북한]] 지역은 [[조선 왕조]]의 차별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때 자강운동이 발달했고 근대화에 적극적이었다. 오죽하면 이때 함경도에는 [[거지]], [[노비]], 기생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때 [[동북 아시아]]에서 평균 신장이 제일 높은 곳이 여기였다. 그 다음이 [[평안북도]]. 믿을 수 없겠지만 이때만 해도 함경도를 비롯한 북부 지방의 별명은 동양의 [[덴마크]]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걸로 [[식민지 수혜론]] 같은 개소리에 빠지지 말자. 그런데 동양의 덴마크라는 별명과는 정반대로 함경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시절 빨갱이 투톱 지역이었다. 함경도에서 특히 빨갱이 활동이 많았던 함경북도 남부의 [[길주군]]-[[학성군]]-[[명천군]]은 '남3군'이라고 따로 부를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북괴 수립 이후 빨갱이 본거지가 된 [[평안남도]]는 당시 조선에서 우익 보수 성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광복 이후(소련군정 시기)=== 해방 직후 [[소련군정]]에 속했다가 북괴에 속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이후 9월 20일 [[에드워드 알몬드]]가 지휘하는 10군단이 함경도의 수복을 맡았는데, [[국군]]은 [[수기사]] 사단장이 된 [[송요찬]] 부대의 북진으로 10월 2일 [[원산시]], 10월 17일 [[함흥시]]가 국군에 수복되었고 이후 11월 6일 [[길주군]], 11월 26일 [[청진시]] 근처 [[부령군]] 부거면까지 진출했다. [[김종오]]가 사단장으로 있었던 [[6사단]]은 원산을 수복한 뒤 평원선 찍고 바로 [[평안도|서부전선]]으로 이동했지만 잠깐 왔다 간 적이 있었다. 미군의 경우 11월 21일 [[혜산군]]을 수복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11월 26일 [[장진호 전투]] 이후 미친 듯이 패주했고 대동강 방어선에서 미친 척하고 버틸 수 있던 기회를 날리면서 전역이 북괴땅이 되었다. 이 때 국군이 철수하는 동안 [[흥남 철수]]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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