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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지배=== 메디치 가문은 한미한 상인 가문으로 시작하였으나, 메디치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cidi)에 의해 피렌체의 유력 상인가문으로 발돋움하였다. 1340년대에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결코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종종 재발하여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1380년대에 흑사병이 피렌체에서 재발하자 조반니는 흑사병으로 인해 가치가 폭락한 피렌체 인근의 부동산을 대량 매입하였고, 이후 흑사병이 진정되자 가치가 반등한 부동산을 팔아치워 대규모의 수익을 올렸다. 조반니는 결혼도 성공적으로 하였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부호귀족가문 출신인 피카르다 부에리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자태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도 결혼 지참금으로 1500플로린에 이르는 거금을 들고 왔다.<ref>이탈리아에서는 결혼 시 신부 집안 측이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오는것이 관례였다.</ref><ref>당시 1500플로린은 군소도시국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으며, 유럽의 대다수 하층민은 1인당 연 수입이 1플로린 이하였다.</ref> 조반니는 피카르다가 들고 온 결혼지참금을 자본으로 하여 로마에 은행을 설립하였고, 이 은행이 성공을 거둬 1397년에 자신의 근거지인 피렌체에 은행을 세워 이 곳으로 본점을 옮겼는데, 이 은행이 바로 메디치 은행이다. 조반니는 로마에서 은행을 운영하던 시절에 당시 추기경이었던 발다사레 코사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훗날 발다사레가 교황(요안네스 23세)으로 즉위하자 교황령은 서유럽 각지에서 교황령으로 들어오는 자금의 관리권을 메디치 은행으로 위임하였다. 이는 두말 할 것없이 메디치 은행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줬고, 메디치 가문은 1410년경에 피렌체 제 3의 부호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정계와 재계가 밀접하게 유착된 국가였고, 이로 인해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위상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치옴피의 난 당시 메디치 가의 행보를 기억하는 대 아르테의 경계도 심화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피렌체 유력가문들의 집중견제를 받고 몰락할뻔 했으나, 당시 메디치 가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교황청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이탈리아 지역강국들의 쉴드 덕에 이를 모면하고, 결국 쿠데타에 성공하여 파치 가문을 비롯한 유수 가문들을 정계에서 몰락시키고 피렌체의 사실상의 지배가문이 된다. 새로이 피렌체의 주인이 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피렌체의 예술 진흥에 아낌없이 투자했고, 이 시기에 피렌체의 문화는 그 정점에 달하게 된다.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후손들은 이탈리아 전쟁당시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지못해 피렌체의 정치에서 영원히 추방당할뻔 했으나, 스페인의 힘을 빌려 다시 피렌체를 장악한 후 공화제를 폐기하고 자신들의 공국을 이 도시에 건설했다. 이로 인해 피렌체 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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