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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격문 == 아, 난적(亂賊)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았으며, 이적(夷狄)의 화가 어느 나라인들 없었을까마는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바로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우리 조선은 기자(箕子)의 옛 나라요, 요(堯) 임금이 봉한 동쪽의 변방 나라이다. 우리 태조(太祖) 이래로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공자의 도를 숭상하였고, 현신(賢臣)이 차례로 일어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웠으며, 이륜(彛倫)이 두텁게 펴져서, 높은 이를 높이고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어 예의와 문물이 밝게 빛났다. 집집마다 인의(人義)와 효제(孝悌)를 행하여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었고, 신(信)으로 갑옷과 투구를 삼고 의로 방패를 삼아 모두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뜻을 두었다. 민속은 태평하여 삼대(三代)의 융성할 때보다 못하지 않았고, 문물은 빛나서 오랫동안 소화(小華)라 일컫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번 사교(邪敎)가 중국에 들어오게 되자 마침내 사해(四海)가 짐승의 냄새로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우리나라만은 동쪽 한구석에 처하여 한 조각 땅이나마 청정(淸淨)함을 보존하였으니, 박과불식(剝果不食)이라 하겠는데<ref>전 세계가 오랑캐로 변하였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이 중국의 도를 지켜 선왕의 의관 문물(衣冠文物)을 보존하고 있다는 뜻. 《주역(周易)》 박괘(剝卦)는, 아래에 있는 다섯 효(爻)는 모두 음효(陰爻)이고 맨 위에 있는 한 효만이 양효(陽爻)이다. 《주역(周易)》에서는 양은 군자, 음은 소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래의 다섯 효는 모두 소인이고 위에 있는 한 효만이 군자이다. 그리하여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 하였다. 이것은 과일을 딸 적에 맨 위에 있는 큰 과일 하나를 따먹지 않는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ref> 그 누가 곤(坤)의 얼음이 굳게 얼 줄을 헤아렸겠는가?<ref>서리를 밟으면 점점 굳어져 얼음이 되듯 조그마한 악이 점점 확대함을 말한 것이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초육(初六) 효사(爻辭)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된다.[履霜堅氷至]” 하였는데, 맨 아래에 있는 음효(陰爻)를 가리킨 것으로 아직은 밑에 있어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점점 확대되면 결국 큰 죄악을 저지르는 변이 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곤괘 문언(文言)에 “신하가 임금을 죽이며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래가 점차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ref> 오직 머리 위에 하나의 상투가 남아 있어 홀로 천하에 뭇 화살의 과녁이 되었다. 아, 저 도적 일본은 실로 우리에게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임진년의 흉사(凶肆)에 이릉(二陵)의 화<ref>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묘인 선릉(宣陵) 및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친 사건을 말한다.</ref> 는 차마 말할 수 있는가? 병자년의 수호조약(修好條約)<ref>고종 13년(1876) 일본이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핑계로 통상조약을 요구하며 8척의 군함을 출동시켜 부산에 입항하고 일본의 전권대신 흑전청륭(黑田淸隆)이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에서 12조의 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일이다.</ref> 은 다만 외이(外夷)가 우리를 엿보는 것을 인도했을 뿐이다. 맹약한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협박이 먼저 이르렀고, 우리의 궁궐을 버릇없이 드나들었다. 죄를 짓고 도망친 무리들을 보육(保育)하였으며<ref>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보호를 받은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서재필(徐載弼)ㆍ서광범(徐光範) 등을 말한다.</ref> 우리나라의 인륜을 무너뜨리고, 예복(禮服)을 찢어 버렸다. 우리나라 국모(國母)를 시해하고, 천왕(天王)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다. 우리 대관(大官)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으며, 무덤과 집을 파헤쳤다. 토지를 빼앗아 민생의 자원에 관계되면 무엇이든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아직도 부족하게 생각하여 갈수록 더욱 탐욕을 부린다. 아, 지난 10월의 소행은 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종잇 조각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여, 오백년 종사(宗社)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천지의 신명도 놀랐을 것이고 조종(祖宗)의 신령도 통곡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통째로 원수에게 준 역적 이지용(李址鎔)은 실로 우리나라 만대의 원수요, 제 임금을 죽이고 남의 임금을 범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이란 놈은 마땅히 천하 열국(列國)이 함께 토벌해야 한다. 세신(世臣)과 교목(喬木)에게는 바로 자방(子房)이 원수를 갚던 때<ref>교목은 오래되어 높다란 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교목세신이란 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휴척(休戚)을 나라와 함께하는 신하를 말한다. 자방(子房)은 한(漢)의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자이다. 그는 처음에는 한(韓) 나라 사람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한(韓) 나라에 5대를 걸쳐 정승을 지낸 세족이었다. 진(秦) 나라가 한을 멸하자, 장량은 나이가 젊어 벼슬하지 않았지만 한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자객(刺客)을 시켜 동쪽으로 놀러온 진 시황(秦始皇)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狙擊)하였으나 실수로 수행원의 수레를 쳤다. 《史記 卷55 留侯世家》</ref> 이며 왕실의 지친(至親)들은 어찌 북지왕(北地王)의 배성(背城)하자는 의리<ref>왕실의 종친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 북지왕(北地王)은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인 유심(劉諶)을 말한다. 후주가 위(魏)에 패하여 항복하려 하자 유심은 노하면서 “만일 꾀가 없고 힘이 없어 화패(禍敗)가 반드시 미친다 하더라도 부자ㆍ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끝까지 싸워서 사직(社稷)을 위하여 함께 죽어야 한다.” 하였다. 후주가 듣지 않자 그는 먼저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도 따라 죽었다. 《三國志 卷33 後主傳列註》</ref> 를 생각하지 않는가. 수실(秀實)의 홀(笏)은 주자(朱泚)의 얼굴을 때려야 하고<ref>정직한 사람들은 오적(五賊)을 쳐야 한다는 뜻. 당 덕종(唐德宗) 때에 번진(藩鎭)의 난을 틈탄 주자(朱泚)는 모반하려고 인망(人望)이 많은 단수실(段秀實)을 위협하여 맞아 왔다. 주자가 수실 등 여러 사람을 불러 일을 모의하다가 ‘천자’가 될 것을 말하자, 수실은 대번에 성내며 일어나서 옆사람의 상(牀)을 잡고 그의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빼앗아 주자 앞으로 나아가서 “미친 역적아, 너를 만 조각으로 토막 내어 죽일 것이다. 내가 어찌 너를 따라 반하겠느냐?” 하고는 그 홀로 주자를 때려 피를 흘리게 하였다. 《新唐書 卷153 段秀實列傳》</ref> 안고경(顔杲卿)의 배의(緋衣)는 어찌 녹산(祿山)이 준 것을 영화롭게 생각하였겠는가<ref>오적(五賊)들이나 왜인들이 준 벼슬이나 물품은 하나도 영화로울 것이 없다는 뜻. 당(唐)의 안고경(顔杲卿)은 안녹산(安祿山)에 의해 상산 태수(常山太守)가 되었는데, 후에 안녹산이 반역하자 할 수 없이 장사(長史) 원이겸(袁履謙)과 함께 녹산을 길에서 뵈었다. 녹산은 고경에게 고관(高官)만이 입는 붉은 색깔의 도포를 주었다. 고경은 준 옷을 가리키면서 이겸에게 “어찌 이것을 입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겸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군사를 일으켜 녹산을 토벌할 것을 꾀하였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ref>. 변을 당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토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임금이 망하는데 신하가 어찌 홀로 살아 있으며, 나라가 망하는데 백성이 어찌 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저 마루 위의 참새와 솥 안의 물고기처럼<ref>곧 환란이 닥쳐오는데도 모르고 태평하다는 뜻. 집에 불이 나서 기둥이 곧 타게 되는데도 여기에 집을 지은 제비는 아무 걱정 없이 지저귄다는 옛말에서 유래하였으며, 솥 안에 든 고기는 곧 삶겨 죽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뜻으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ref> 함께 죽게 되었는데 어찌 한번 결전(決戰)하지 않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죽어서 충의(忠義)의 혼(魂)이 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익현(益鉉)은 나이가 많고 병이 깊으며 재주도 없고 힘도 부족하여 조그마한 충성도 바치지 못하였다. 비록 귀양 갔던 부끄러움이 있으나, 목숨이 아직 남아 있으니 복수할 뜻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그러나 큰 집이 무너지는 데 나무 하나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으며, 맹진(孟津)의 물이 넘치는 데 한 줌 흙으로 막을 수는 없다. 시장(市場)에 들어가 오른팔을 벗으면 반드시 왕손(王孫)을 따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ref>자기를 따르는 의병이 있을 것이라는 뜻. 전국 시대 제 민왕(齊湣王)이 부하인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자 그의 신하였던 왕손가(王孫賈)는 시장에 들어가 요치를 토벌할 것을 말하고는 이에 찬동하는 사람은 ‘오른팔을 걷어 올리라.’ 하니, 따르는 장꾼이 4백 명이었다. 왕손가는 이들을 데리고 요치를 공격하여 죽이고 민왕의 아들을 세워 제 나라를 구하였다. 《戰國策 卷13 齊策》</ref>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쳐들어가면 누가 감히 책의(翟義)를 공격하겠는가<ref>의병을 공격할 사람이 없다는 뜻. 한(漢) 나라 때 왕망(王莽)이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어린 왕을 세워 스스로 천자의 일을 대신하자, 동군 태수(東郡太守)로 있던 책의(翟義)는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서 서쪽인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漢書 卷99上 王莽傳》</ref>. 모든 우리 종실ㆍ대신ㆍ공경ㆍ문무관ㆍ사ㆍ농ㆍ공ㆍ상ㆍ서리(胥吏)ㆍ여대(與儓 하인(下人))들은 우리의 창과 방패를 수선하고 심력(心力)을 통일하여 역적의 무리를 섬멸하여야 한다. 놈들의 고기를 먹고 놈들의 가죽을 깔고 자며, 저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멸하고 그 소굴을 소탕하여 무엇이든 복구하여 국세(國勢)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위험을 안정으로 바꾸어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하여야 한다. 오직 믿는 것은 군사를 일으킨 명분이 정대하니<ref>명분이 바른 의병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13년에 진(晉) 나라 자범(子犯)은 “군사는 명분이 정대하면 장(壯)한 것이 되고 정대하지 못하면 파리한 것이 된다.” 하였다.</ref> 적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으로 두루 고하노니 성공하도록 함께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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