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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만 정벌과 북벌 === 유비가 죽은 이후 촉한은 유비의 입촉 이후 잠잠했던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이중에선 익주 남부 여러군이 일으킨 반란의 규모가 컸다. 이에 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으며 남만으로부터 군수물자가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이에 군무를 다스리고 병사들에게 무예를 닦게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이때 아직 유망한 젊은 관리인 [[비의]]를 향후 장완의 후계자 감으로 점찍는다. 이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가 죽은 227년에 제갈량은 마침내 북벌을 결심하고 촉한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출사표(出師表)이다. {{인용문|신 량은 아뢰옵니다. 선제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 존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지키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임금께서 귀를 열어 널리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총언과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과 관부는 모두 한 몸이니 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 시랑인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진영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을 화목하게 하고 그 우열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이 바로 전한이 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무명옷을 입은 평민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져 등용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분주하게 힘쓸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악한 흉적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옛 수도(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책과 본분이며, 손익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제갈량|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 1차 북벌 ==== 그리고는 출병하여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이 과정에서 맹달을 회유해서 북벌을 뚜룩치려고 하나 사마의가 재빨리 [[맹달]]을 처죽이는 바람에 실패. 228년 봄, 제갈량은 야곡도를 거쳐 미성을 취하려 한다고 일부러 소문내고 조운, 등지를 속이는 군사로 삼아 기곡을 점거하게 하여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을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이 기회를 틈타 제갈량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는데, 군진이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하니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여 [[관중]]이 진동했다. 위나라의 2대 황제 명제 [[조예]]는 이에 장안에 머물면서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이에 제갈량은 요충지인 가정을 먼저 선점하여 마속에게 요충지를 지켜 장합과 싸우게 했는데 이때 주변 제장들은 오의나 위연을 보낼것을 주장했으니 제갈량이 굳이 마숙을 보내고 부장으로 왕평을 보낸다.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요충지를 버리고 산에 올라 장합을 상대하는 바람에 대패했으며 전후 수습도 안하고 도망가다가 잡혔다, 병신. 이 똥은 [[왕평]]이 천여명의 군사를 가지고 피똥을 싸면서 간신히 수습. 어쨋거나 제갈량은 천수군 서현의 천여 집을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으며 유선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벼슬을 깎았다.<ref>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읍참마속(泣斬馬謖)이고 다른말로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이라고 한다 둘다 '''법은 예외없이 엄격하게 집행돼야 하며 그래야 법의 위엄이 선다'''이지만, 현대에는 슬프지만 어쩔수없이 진행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ref>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 행승상사로 삼았다. 이때 투항자중에 [[강유]]가 있었으니 제갈량은 휘하의 장완, 장예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유를 '양주 최고의 인재'라고 평가하며 중하게 썼다. ==== 2,3,4차 북벌 ==== 이해 12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를 학소를 보내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고 공성병기를 많이 잃어 퇴각했다. 이때 위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2차 북벌) 바로 다음해인 229년 1월에,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 음평을 공격하고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하니 마침내 두 군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은 두군을 점령하고 저, 강의 이민족과 서로 통했으며 촉한의 방위와 위나라 진출의 교두보를 닦은 공으로 다시 승상이 되었다. (3차 북벌) 이후 230년에는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위군이 별 소득 없이 불러가자 위연과 오반을 보내 위군을 다시 격파하였다. 231년 2월에,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병했다. 목우(牧牛)로 군량을 운송하면서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이 옛 북지의 석성에 도착해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기산 북동쪽인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곽회와 비요의 위군과 조우해 그들을 격파하고 보리를 대거 수확했다. 그러나 보리의 손실을 우려한 사마의의 본대가 급진해 험준한 곳에 이르자, 양군은 각기 진채를 정비하며 대치했다. 이후 촉군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자 위군이 이를 쫓아가 5월 10일 경, 노성 부근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이, 기산 남부에서 장합과 왕평이 크게 싸웠는데, 노성에선 제갈량이 사마의를 막고, 기산에선 [[왕평]]이 [[장합]]을 격퇴했으며, 이에 위군의 두 지휘관이 퇴각하여 본진을 지켰다. 이후 [[이엄]]의 거짓보고로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을 추격하게 했고 제갈량은 장수 장합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제갈량이 돌아온 이후 이엄의 속임수가 밝혀지고 이엄은 파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4차 북벌) 이건 권모술수 쩌는 사마의가 장합을 일부러 사지로 내몬거라는 떡밥이 있는데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장합은 출병을 꺼려했다는 사서 기록이 있다. 4차 북벌에서는 [[손권]]의 찐따짓 때문에 실패했다. 제갈량과 손권은 둘이 동시에 위나라를 쳐들어가자고 협의했다. 제갈량이 장안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동시에 손권이 합비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작전계획이다. 때마침 [[장료]]가 죽은 이후인지라 손권은 나름 기회라 생각했었지만 '''손권은 출병하자마자 [[만총]]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결국 제갈량의 4차 북벌도 같이 실패했다. ==== 5차 북벌 및 죽음 ==== [[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수 남쪽에서 대치했다. 이후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사마의가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다리를 만들자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했다. 한편 제갈량은 우회기동으로 위군의 허를 찔렀으나 [[곽회]]의 기지로 인해 저지되었다. 이후 사마의가 교전에 응하지 않고 굳게 지키니 전장은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오장원에서 촉군은 수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위군이 교전에 응하지 않으니 촉군은 오장원에 눌러 앉는다. 평소 제갈량은 늘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오장원에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로서 제갈량은 위수 남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촉군의 둔전이 시작되고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위나라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제갈량은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를 보내 도발하였는데 사마의가 분노하여 싸우기 위해 명제 조예에게 청하니 조예는 신비에게 부절을 딸려보내면서 싸우는 것을 막았다. 이에 강유가 저들이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라 탄식하니 제갈량은 '본디 사마의는 싸울 마음이 없고 단지 황제의 지지를 받아 장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라 평했다. 한편 사마의는 제갈량이 식소사번<ref>食小事煩, 즉 식사는 적게하고 일은 과중하다는 의미로서 당시 평균수명을 따져보아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 늙은 제갈량이 과로하여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f> 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제갈량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여겨 수비를 굳건히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9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이를 후세에 [[추풍오장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이를 추격하다가 퇴각을 맡던 [[강유]]가 군을 돌려 공격할 태세<ref>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외모를 본딴 나무인형을 평소 제갈량이 타고 다니던 수레에 태우고 진군시켜 사마의를 놀래키는 장면이 나온다.</ref> 를 취하니 황급히 후퇴하는데<ref>정사의 기록으론 제갈량 사후 촉군이 군을 정돈하고 퇴각하자 사람들이 사마의에게 급히 알려 사마의가 바로 추격했는데 촉군을 이끌던 강유와 양의가 북을 울리고 마치 공격할 것처럼 대응하자 추격하던 사마의가 군사를 바로 물리고 감히 촉군을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에 촉군이 죄다 후퇴한 뒤에야 후퇴한 촉군의 영채를 살펴보았다고 나온다.</ref> 이런 모습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좆았다는 의미로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된다. 이후 사마의는 후퇴한 촉군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이후 사마의는 촉군의 영채에서 많은 책서와 양곡을 노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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