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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적 배경 ===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선인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김머중]]과 1:1 드림 매치가 성사되었다. 당시 박통은 대선에 나가고자 [[3선 개헌]]을 단행했지만 역시 무리수였다. 차기 대통령이 확실했던 김종필를 중심으로 여당 [[민주공화당]] 내에서 항명 사태가 터졌고 결국 박통이 이에 열 받아서 [[중앙정보부]]를 시켜 김종필을 비롯한 그 계파에게 코렁탕도 선물하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 김종필이 "임자~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은 네가 해~"란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결국 밀어주기로 하여 힘겹게 3선 개헌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3선 개헌에 성공하고 돈을 아주 물 쓰듯이 뿌렸는데도 김머중과 겨우 94만 표 차이로, 박통이 53.2%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국가 예산의 무려 15%를 쓰며([[김종필]]의 증언) 막걸리, 고무신을 돌리고 중정을 이용하고 각종 관제 단체까지 활용하고 지역 감정을 유포했는데 일각에선 이 7대 머선이 영호남 지역감정의 효시라고 볼 정도였다. 물론 김머중이 정계에 뜨기 시작할 때부터 먼저 호남차별론을 꺼내와서 지역 감정을 정치에 이용해서 뜨기 시작한 거라서 지역감정에 대해서 김머중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만약 공정하게 선거를 치렀다면 100만 표 이상으로 김머중이 이겼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고 한다.(역시 [[김종필]]의 증언) 이에 박통은 엄청난 충격과 당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애송이 뉴비였던 김머중에게 밀렸다는 데에서, 그리고 그렇게 돈을 썼는데 근소하게 이겼다는 데에서 오는 치욕감과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신민당에게 정권 뺏긴다는 위기감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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