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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전개, 결과 == 나리아키라는 에도의 가로 시마즈 히사타케(島津久武), 니카이도 카즈에(二階堂主計) 등 개혁파에게 지지를 받았고 히사미츠는 시마즈 히사타카(島津久宝), 시마즈 히사노리(島津久徳), 이쥬인 타이라(伊集院平) 등의 나리오키파에게 지지를 받아 이들은 점점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가에이 2년(1849년), 나리아키라의 4남 토쿠노스케(篤之助)가 사망하면서 나리아키라파와 히사미츠파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고 젊은 번사들이 많은 나리아키라파에서 히사미츠파의 중신들을 참살하는 사건들이 잦아지고 즈쇼파의 악명을 열거한 밀서가 나리오키의 손에 들어오자 1849년 12월 3일, 나리아키라파의 중신(타카사키 하루타카, 시마즈 히사타케)들과 번사들을 체포하여 할복을 명하였으며 50명의 번사들을 칩거, 원도<ref>遠島.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 보내는 에도시대의 형벌이다.</ref>하였다.<ref>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그냥 할복을 한 번사들도 있었다고 한다.</ref> 나리오키의 체포명령에서 달아난 나리아키라파의 몇 번사들은 쿠로다 가의 후쿠오카 번으로 탈번하여 나리아키라와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번주 쿠로다 나가히로(黒田長溥)에게 도움을 요청, 나가히로는 이를 받아들여 이들의 체포 및 반송을 요구한 나리오키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난부 노부유키(南部信順)와 함께 노중 아베 마사히로에게 사태의 수습을 호소하였다. 나리아키라를 이전부터 지지했던 아베 마사히로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킬 것을 명해달라 요청하였고 이에요시는 나리오키에게 다기를 내리며 은거를 촉구하였다.<ref>다기를 내리는 것은 은거하고 차를 즐기라는 뜻이다.</ref> 쇼군의 명을 거절할 수 없는 나리오키는 결국 가에이 4년 2월 2일(1851년 3월 4일) 나리아키라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은거하게된다. 이 사건의 계기가 된 오유라는 큰 처벌 없이 넘어갔으며 게이오 2년(1866년) 가고시마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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