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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쯤 성공한 대표적인 리빌딩 97삼성=== {{라이온즈종신감독}} {{라이온즈그자체}} 1996년에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와서 [[세이콘|모 감독]]에 의해 55 찍던 팀을 감독 첫 해에는 6위했지만 KBO역사에 다시 없을 급속 리빌딩에 완벽히 성공했고, 그 후 4위의 성적을 찍는 것으로 시작하여 삼성은 12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성공했다. 그때 삼성이 어느정도였냐면 좃크보 최초 20홈런 타자 4명과 20-20 타자 2명(최익성,양준혁) 홈런왕 오푼이까지 배출한 오모시로이 한 타선이었으며,(물론 대구빨로 홈런이 많긴 했는데, 광주 대전 인천 전주도 당시에는 만만치 않았다. 즉 잠실 빼면 지금 탁구장으로 분류되는 사직이 홈런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죄다 탁구장이었던 시절, 지금 최고의 탁구장은 사직이랑 비슷한 인천이지만 이시절에는 명함도 못내밀었다.) 특히 오푼이는 보이지 않는 그분의 지상 최초 홈런왕-도루왕 동시 석권을 막으면서 mvp를 가져갔다. 순페이 야왕 노지심 홍미륵이 최전성기였던 1992년 해태의 최다득점기록을 경신한 팀이었다. 덧붙여 그 해태 이후 2번째로 700득점을 돌파한 팀. 지금 보면 700득점이 우수워 보이겠지만 그해 우승한 해태가 득점 2위였는데 삼성이랑 100점 이상 차이나게 적었고 칰 꼴떼 빈대는 500득점도 못할 정도로 투고타저였던 시기였다. 다만 그때 투수진은 씹창이라 꼴떼 다음으로 많은 살점을 허용하기도 했다. 즉 이시절 해태는 점수 많이 내고 적게 실점하면서 승리를 챙기는 팀이었다면 삼성은 매일 불꽃놀이를 즐기는 팀이었다. 총득실 +117로 해태 +106보다 우위고 피타고라스 승률에 의하면 해태와 자웅을 겨루는 2위인데,(공식상 적게 득실 한 팀이 유리) 투수들이 까먹으면서 쌍방울한테 밀린 4위를 하고 말았다. 즉 크게 이기고(27-5 정경배 연타석 만루홈런도 이해 기록) 작게 지는 경기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준플에서 쌍방울한테 보복은 했지만, 투수력에 과부하가 걸리며 LG에게 한국시리즈 티켓을 넘겨주고 만다. [[오푼이]]도 자신이 거포타자가 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으로 백인천 감독을 꼽았다. (다만 삼성 시절에 [[강기웅]]을 은퇴로 내몬 건 숨겨진 만행이었다만..)<br> 그렇게 갔으면 "[[종신감독]]"이라는 틀은 가지지 않았을텐데 22 [[파일:51bb1e510463738cdb5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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