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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 의의 == === 한국 문화재 발굴사의 결정적인 전환점 === 이전까지만해도 한국은 발굴 및 고고학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정도였고 발굴된 유물도 죄다 일제강점기때 일제가 도굴을 목적으로 파냈다가 나온 유물들이었기에 순수 한국인이 발굴을 해서 조사한 유물이 아예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처녀분인 무령왕릉을 발견하게 되고 최초 순수 국산기술로 발굴을 한 첫 작품이다. 근데 발굴이라기보다 거의 도굴에 가까울 정도로 개판을 쳐놨으니... 심지어 당시 현장이 어떻게 되어있었는지에 대한 실측 도면도조차 그린게 없다. 현재 도면도로 남아있는건 당시 발굴팀들의 기억을 더듬어서 그린 상상도이다. 하지만 이때의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후 경주에서 출토된 [[황남대총]]이라던지 [[천마총]]을 발굴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도 이때의 실수를 모면하기위해 문화재 발굴 사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현재 역사 교과서에 실린 대부분의 유적지들이 발굴되고 수많은 숨겨진 국보들과 보물들이 출토된다. 한번 거하게 똥을 싸야 정신을 차리는 헬조선의 본성을 제대로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사실 무령왕릉 사건 이전에도 헬조선의 문화재 보호 의식은 ㄹㅇ 1도없었다. 일제가 파괴시켰니 뭐니 하지만 실상은 국민들부터가 문화재를 보존해야한다는 의식이 1도없었고 그냥 지나가다가 흔히 보이는 돌덩이나 조각상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석굴암]]만해도 일제가 파괴시켰니 뭐니 해도 일제가 발굴하기전까지는 그냥 버려져서 다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일본이 공구리를 쳐서 망가트린건 맞지만 공구리로 임시방편이라도 안했으면 진작 무너져내렸을것이다. 실제로 일제가 공구리치기 전에는 석탑이라기보다 돌무더기에 더 가까울정도로 심하게 무너져있었고 방치되어있었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로 현재 역사책에 실리는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인 압력 및 지원하에 전면 복원되었고 물론 [[숭례문]]이나 [[광화문]]의 경우처럼 당시 기술력과 자본력의 부족으로 야매로 복원된것도 수없이 많지만 문화재가 드디어 "문화재"로써의 가치로 인정받기 시작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고학 및 사학의 현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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