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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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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시대=== {{진지}} {{선비}}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공화정 말기에 군사호민관(Tribunus Militum)→재무관(Quaestor)(30세)→안찰관(Aedilis)(36세)→법무관(Praetor)(39세)→집정관(Consul)(40세)→감찰관(Censor)이런식의 승진코스가 최고의 엘리트코스가 있었는데, 이걸 거치지않은 넘들은 원로원이 존나 싫어했고 왕따했다. 암튼 7왕 시대이후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도시국가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 동네 깡패 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은 라틴 연합을 결성해 로마를 압박한다. 그러나 로마는 존나 짱짱셌기에 가볍게 쓸어버리고 카시아눔 조약을 맺게한다. 카시아눔조약은 로마가힘들때 라틴동맹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존나 세진 로마는 눈에 뵈는게 없어져 기원전 396년 옛주인니뮤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를 공격하고 점령한다. 이때 베이의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했고, 텅 빈 베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평민과 금수저 귀족니뮤들의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어난다. 평민들은 로마 시민의 절반을 베이로 이주한 다음 살게 하여 또다른 신 로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새 도시를 만들고 가서 짱먹어야 귀족되니까). 하지만 이런 상당히 급진적인 의견에 금수저들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였고 특히 베이공략를 지휘한 카밀루스가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다. 그러자 금수저가 될 가능성을 잃어버린 평민들은 분개하였고 카밀루스를 횡령 혐의로 고발한다.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민들은 카밀루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기로 작정했기에 카밀루스가 무죄 판결받는 것은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로마를 떠난다. 근데 로마가 지네끼리 치고받고 개지랄을 쳐하는 사이에 북부 이탈리아 너머에서 갈리아족이 쳐들어와 북이탈리아의 클루시움이라는 로마의 동맹시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지네끼리 쳐싸우기바빴던 로마는 깜짝놀라 교섭사절을 보낸다. 하지만 교섭은 결렬되었는데 이때 로마의 사절 중 하나인 퀸투스 파비우스라는 새끼가 야수의 심정으로 칼을 휘둘러 대국적이지 못한 갈리아 족장을 살해한다.(교섭을 좀 대국적으로 하시오!) 이는 당연히 시발 외교적으로 불법적인 행위였고 때문에 빡친 갈리아인들은 사절을 로마에 파견해 파비우스를 내놓으라고 한다. 갈리아인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였지만 로마인들은 존나 뻔뻔하게 쌍뻐큐를 날렸으며 아예 퀸투스 파비우스를 당시엔 집정관에 해당했던 군사 호민관으로 선출하고 지휘권(임페리움)까지 부여한다. 이는 갈리아인들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 소식을 들은 갈리아인들은 바로 클루시움의 포위를 푼 뒤 로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변 도시에 자신들이 로마로 가고 있으며 오직 로마만 공격할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행군하였고, 또한 가축과 농장엔 손 하나 대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전혀 방해받지 않고 병력을 고스란히 보존한채 로마 시에서 고작 14km 떨어진 곳에 이르게 된다. 당시로마는 라티운지역(도시로마의 인근지역들)의 패권자였고 갈리족에비해 두배가 넘는 병력을 이끌고 있었기에 매우 간단하게 갈리아족을 분쇄할수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존나 쓸려나갔고 갈리아족은 당시까지만해도 성벽이랄게 별로 없던로마 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의 군대가 갈리아족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얼른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노 언덕 위로 줄행랑을쳐 농성했고 갈리아족은 이들을 포위는 했지만 점령할 수 없었다. 빡친 갈리아족은 로마 시내의 건물들과 문서들을 닥치는대로 작살내버렸다. 그 결과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 문서들은 모두 소실된다. 갈리아족은 로마 시내를 점거하긴 하였으나 카피톨리노 언덕의 로마인들이 계속 게릴라활동을 하였고 또한 베이의 문제로 자진해서 로마를 떠났던 카밀루스가 자신이 조직한 사병을 이끌고 외부에서 호응하자 로마에 계속 눌러앉기가 힘들었다. 이때 로마인들은 갈리아족에게 협상을 제의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하고 이에 갈리아족은 존나 엄청난 양의 황금을 요구한 뒤 이를 받고 돌아간다. 이러자 로마 시민들은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자 갈리아한테 존나 개쳐맞은 로마를 주변 라틴 도시들은 깔보기 시작했고 저번에 맺었던 카시아눔 조약 따윈 개무시하고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한다. 로마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카밀루스를 독재관(어떤 개병신새끼가imperator라고 써놨었는데 사실은 dictator이다.)으로 삼았고 그의 지휘 하에 싸가지 없는 라틴도시들을 열심히 무찌르며 간신히 체면치레를 한다. 로마는 갈리아족에게 쳐맞은것을 계기로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그리스식 팔랑크스 스타일을 버리고 그 유명한 레기온(군단)제제로 바꾼다. 한 갈리아 족을 상대하였을 때 군제개혁이전에는, 우수한 무장을 갖춘 신분 높은 은수저계급이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양익이 달아나면서 중앙이 포위, 그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후로 높은 은수저,금수저계급의 생존률을 높히기 위해 계급 순으로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 이것은 마니풀루스 체제 (아직 짬이덜찬 어린 짬찌새끼들은 군단의 전위를 맡는 "하스타티"로 배속되었고 20대후반에서 30대의 아직 꼬추는 잘서고 어느정도 짬이 찬 넘들은 군단의 중추를맡는 "프린키페스"로 배속되었고 마지막으로 짬이 찰대로 찬 상꺽이상의 꼬추잘안서는 40대이상의 아재들은 군단의 후위를 맡는 "트리알리"로 배속되었다. 또한 개거지 똥수저새끼들은 각각 전방에서 투창을 던져 짤짤이를 넣거나 정찰을 하는"벨리테스"와 군단의 최후미를 맡는 "아텐시"로 배속되었다.)이다. 50년후 라틴 연맹은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데 그 이유는 라틴 연맹이 자기네와 함께 공화국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로마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는 라틴 연맹보다 세력이 컸으므로, 굳이 권력을 나눠먹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 싸움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 로마는 라틴 연맹을 해체하고 여기에 있던 도시국가들을 동맹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로마가 라티움지역에서 대빵노릇을하고있을때 이탈리아 아펜니노산맥너머에서살던 삼니움족일부가 라티움지역 밑의 비옥한 캄파니아지역을 침략한다. 캄파니아지역의 도시국가들은 윗동네 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에 응해 삼니움족을 줘패고 덤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캄파니아도 동맹시(노예)로삼는다. 그런데 15년후 삼니움족은 다시 캄파니아지역을 침략하는데 이번엔 15년전보다 훨씬규모가 컸었다. 이에 동맹시를 지킬의무가 있는 으리의 로마는 삼니움과 다시싸우는데 이가 2차 삼니움 전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코호락호락하지않아 전쟁은 22년간 계속된다. 이때문에 로마는 삼니움족의 본거지인 아펜니노산맥으로 기어들어가 이들을 섬멸하기위해 두명의 집정관과 네개의 군단(약 2만4000명에서 3만명정도로추정)을 보내는데 산악민족인 삼니움족은 미리 매복하고있다가 공격해 큰승리를 이루고 나머지를 모두포로로 잡는다. 이때 삼니움의 족장은 병신같게도 다죽이지않고 포로들을 부하들이 '''강간'''하게하고 풀어주는 최악의 수를 둔다. 이에 로마는 많은 병력을 보존한채 전략을바꿔 삼니움족을 산속에 고립시키는 전술을 쓴다. 삼니움은 궁지에 몰리다가 갈리아족까지 끌어들여 센티눔이라는 도시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해멸망한다. 이때로마군은 한차례의 진화를 또다시 거쳣다. 유명한 필룸과 스큐툼이라는 사각방패를 도입하게된것이다. 삼니움전쟁이 끝난후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차지하게되었다. 자연히 이탈리아남부의 그리스계도시들과 국경을 마주하게되었고 당시 이탈리아남부에서 가장강력한 도시국가 "타렌툼"에 선전포고하게된다. 타렌툼은 동맹국이엿던 그리스서쪽지방의 에피루스왕국에 도움을 청한다. 당시 에피루스 왕국은 피로스라는 아주 유능한 장군님이자 왕이 다스리고있었는데 이인간은 로마를 조지고 이탈리아를 차지하려는 욕망에 전쟁에 참전하였다.(BC.280)피로스는 명성에 걸맞게 헤르쿨리아전투와 아스쿨룸전투에서 두번이나 로마군을 씹어드셨다. 그러나 손실이 너무컸고 로마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기에 시칠리아섬으로 전선을 옮기게된다. 그러나 보급이 막혀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게된다. 이때 피로스가 시칠리아에서 병신 개삽질하는동안 로마군은 더많은 군단과 동맹시에서 징집한 보조군을 편성하였고 존나 충격과 공포에 빠진 피로스는 로마군단들이 모이기전에 각개격파를하려고 베네벤툼에 주둔하던 두개군단을 야습했으나 미리알아챘던 로마군에게 개쪽당하고 지네나라로 돌아가게된다.그리고 지켜줄 고기방패가 없어지자 타렌툼을 포함한 남부이탈리아국가들은 로마에 항복한다. 남부이탈리아를 차지하자 이탈리아전체를 지배하게된 로마는 이제 카르타고와 동맹관계에있던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를 점령하게되는데 이때문에 1차포에니 전쟁이 발생하게된다. 그러나 여러분이알다시피 카르타고는 개털리고 로마는 시칠리아섬 전체를 쳐먹는다. 2차포에니전쟁은 그유명한 한니발한테 개쪽당하다가 개털어버린다. 당시한니발은 도시로마를 공격은 할수잇었으나 못했던것이다. 안그래도 병력보존도 시급하고 보급도 잘안되는데다 수도지키러온 군단들까지 상대하기란 불가능했기대문이다. 미쳤다고 공격하나 그 뒤 2차 전쟁에서 [[한니발]] 때문에 좆될 뻔 하기도 햇으나 잘 버텨내 역전했고, 어찌되었든 포에니전쟁은 3차까지 간 끝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정치 기구==== ===== 정무관 ===== 로마 정무관 서열 * 호민관(Tribune) -> 재무관(Quaestor) -> 조영관(Aediles) -> 법무관(Praetor) -> 집정관(Consul) 이와같은 서열은 귀족과 평민의 신분투쟁 과정에서 완성된 것이다. 호민관은 본래 평민을 대변하는 관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정무관 서열 속에 들어와버렸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호민관을 그냥 말단 관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호민관 당선인들도 대부분 원로원에 싸바싸바 하다가 자기도 원로원으로 입갤하는 걸 원했기에 형식적으로 평민의 대표지만 별 하는 것도 없는 직위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원로원 입갤을 포기해버리고 그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호민관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직위의 클라스를 높여버렸다. 어차피 호민관은 선출직에 임기제한도 없는터라 평민의 지지만 얻으면 다시 할 수 있는 구조였고 그라쿠스 형제는 그 맹점을 파고들어 로마의 정치적 지도를 확 뒤집어버렸다. 이들의 활약 이후 귀족이고 평민이고 호민관이 엄청난 권한을 가진 관직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평민이 정치적으로 규합되면서 평민의 대표 호민관 vs 귀족층의 원로원 구도가 자리잡게 된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이 호민관 권한을 이용하여 일인 독재 체제를 완성시킨다. 재무관은 재무를 담당하는 관직이고, 조영관은 공공사업이나 축제, 경기 등을 담당하는 관직이었다. 법무관은 말그대로 본래는 법무를 담당하는 관직이다. 법무관부터는 고위 정무관으로 인식되었다. 군대 지휘권(Imperium)이 부여되었기 때문. 물론 이런 고위 정무관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빽이 있어야했다. 그래서 결국 귀족들이 대부분 다 해먹는다. 로마가 얼마나 귀족 중심의 사회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고위 정무관 중 하나로 감찰관(Censor)라는 관직도 있긴 한데, 상설 관직은 아니였고 약간 명예직 같은 관직이였다. 그렇다고 할일은 없는건 아니였고, 인구조사 겸 재산조사(Census)를 하거나 풍기단속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실 법무관이랑 감찰관은 탄생부터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신분투쟁 과정에서 귀족들이 평민들에게 권한을 양보하는 대신, 귀족들은 새로운 직책을 만들면서 그것을 독차지 했기 때문. 그 새로운 직책이 바로 법무관과 감찰관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신분투쟁 과정을 계속 거치면서 결국 평민들에게 개방되게 된다. 예외적으로, 독재관(Dictator)라는 관직이 있다. 국가 비상사태시 집정관 중 한명에게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을 임명하여, 사실상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나중에는 술라나 카이사르 같은 정치군인들 때문에 '종신 독재관'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사실 종신 독재관이 나오는 순간 로마 공화정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 조영관부터는 호위병사(Lictor)들을 끌고 다닐수 있었다. 이들은 도끼 비슷한 거(Fasces : 하나된 힘을 상징하여 나무막대기 여러개를 묶고 위쪽에 도끼날을 매담) 들고다니면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다녔다. 독재관은 24명, 집정관은 12명, 법무관은 6명을 이끌고 다녔다. 참고로 파시즘(Fascism)이라는 말이 이 Fasces에서 유래되었다. ===== 민회 ===== 이러한 민회는 기본적으로 로마 시의 시민인 자에게만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시대가 지나고 로마의 크기가 이탈리아의 작은 동맹연합 수준을 넘어 제국의 수준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로마 시의 시민들만의 의견만으로 결정하기에 불합리한 문제들이 닥쳤고, 그 결과 로마 시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동맹시 시민들에 대한 참정권의 여부를 두고 내전까지 겪어가며 결국 그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이 내전을 통해 마리우스, 술라와 같은 정치군인이 대두한다. 이후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인해 누구든 군대에 복무하면 로마 시민이 될 수 있게 된다. 상술한 그라쿠스 형제 이후로 호민관 선출에 대한 경쟁이 심화되었으며 귀족층이고 평민층이고 지들 꼬붕을 호민관 시키려고 선거철만 되면 지랄난리가 났다. 그때는 선관위고 뭐고 없던 시절이기에 뇌물은 애교요, 남의 유세장 가서 깽판치기, 심하면 상대 후보 담구기 등 좆같은 초기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막장이 여기서 다 나왔다. (승만센세...) 선거도 막장이었고 정치판도 막장이었다. 그라쿠스 형제도 개혁가이긴 했지만 정치적 반대파를 처리하는 방법은 오늘날 인민민주주의와 비슷했으며 그렇다고 그걸 처리한 원로원도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민주주의의 기초적 개념부터 날려먹는 수단으로 해결을 봤다. 그라쿠스를 지키기 위해 지지자들은 몽둥이를 들고 광장에 모였고 반대파도 모이면서 그 날 수천명의 시체가 테베레 강에 가라앉았다. 그 결과 로마 정치판엔 그때부터 지지자들이 몽둥이와 돌을 들고 광장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유구한 전통이 생겨났으며 이는 후에 정치군인들이 자기 군단에서 복무한 퇴역병들까지 끌어들이면서 진짜로 살벌한 전쟁터로 변한다. 어제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아시아에서 야만족 대갈통을 뎅겅 자르던 아재들이 오늘은 수도 한복판에서 이러고 다녔던거다. 이러니 정치판은 극단주의로 흘러갔고 결국은 강력크한 독재자의 등장이라도 이 혼란만 진압하면 된다는 의식이 생겨버린다. 결국 독재자가 등장하고 그 독재자가 평민 대표인 호민관을 겸임하게 되면서 민회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게 된다. * 병사회/백인조회 (Comitia Centuriata) 로마 민회라 하면 보통 이 민회를 의미한다. 여러 민회 중 가장 핵심적인 민회. 왜 백인조(Centuria)냐면 로마 왕정시기 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재산 등급에 따라 시민들을 백인조 단위로 분류했는데, 이게 공화정 시기 투표 단위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민회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표를 행사하여 여러 주요 안건들을 의결하고, 고위 정무관을 선출하였다. 근데 이 투표가 웃긴 점이 있다. 총 193개 백인조를 재산 등급에따라 특급/1등급에서 5등급까지 나누고, 개표를 특급/1등급부터 먼저 했는데 거기서 바로 과반수가 나오면 그냥 통과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금수저들의 표로 모든 것이 다 결정날 수 있었던 것이다. * 부족 민회 (Comitia Tributa) 로마는 로마시 4개부족 + 농촌 31개 부족 합쳐서 총 35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졌다. 근데 농촌에 있는 농민들이 일 버리고 직접 로마로 가서 투표하기 좀 귀찮고 해서, 실제로는 돈받고 투표 알바뛰는 놈들, 혹은 농촌 소속이지만 도시에 사는 금수저들의 입김이 강했다. * 평민회 말그대로 평민들을 위한 민회였다. 그리고 이 평민회를 대변하는 사람이 바로 호민관이다. 본래는 공식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 이후 평민회의 결의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원로원(Senatus)===== 로마가 과두정, 귀족정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즉 원로원이 로마 정치의 핵심. 약간 자문기구 비슷한 건데, 이 자문이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실권이 정무관들한테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로원이 쥐고 있던 셈. 또 '원로원 최종결의'라는 것을 선포하여 불온분자들을 제거할 수도 있었다. 그 희생양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 당연히 원로원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다 귀족들이었다. 물론 키케로처럼 귀족들 후빨을 열심히해서 원로원 의원이 된 사람도 있지만.. 이런 원로원도 결국 정치군인들에 의해 쇠퇴하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이후,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가 갈등하는 과정에서 정치군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자기 세력을 최대한 많이 불릴려고 원로원 의석수를 막 뿌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 300석이었던 원로원이 (아마 술라때였나?) 600석이 되고, 나중에 카이사르 때가 되면 900석이 된다. 이렇게 의원직을 남발하는 상황 속에서 원로원 권위가 유지될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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