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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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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북양정부)|북양정부]] 시절=== 1911년에 신해혁명이 터지자, 간보던 량치차오도 중국으로 돌아온다.<ref>사실 신해혁명 이후에도 한참 더 간보다가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이 끝나서야 겨우 입국했다. 혁명 극초기에 입국거부 당한 탓도 있고</ref> 혁명파도 그랬지만, 량치차오 역시 위안스카이 독재 정권 성립에 기여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량치차오가 훨씬 적극적이었다.<ref>위안스카이와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권한건 캉유웨이였지만 그거 갖고 량치차오 쉴드쳐주긴 좀 그렇다</ref>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가 변법운동을 통수친 개새끼인건 사실이지만 혼란한 시대상황을 정리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것도 그뿐이고, 국민당은 너무 과격하며, 중앙집권이 필요하지만 내전을 벌일수는 없으니 연성자치론이 최선'이라면서 온건 계몽주의자들과 온갖 떨거지들을 모아 진보당을 결성해 위안스카이 정권에 적극 협조한다. 심지어 쑹자오런이 암살당했을 때도 위안스카이에게 협력한다. 쑹자오런은 (혁명파 중엔 몇안되는) 량치차오와 뜻이 비슷한 의회주의자였고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를 지지한 것이다. 이로인해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원씨네]] 개새끼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게 된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계속해서 깽판을 쳤고 결국 줄곧 그를 옹호하던 량치차오마저 돌아서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가 야심차게 만든 '인재 내각'을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의원들을 감금, 협박하는 부정선거를 통해 독재를 했다. 여기에 좌절한 량치차오는 정계에서 은퇴한다. 아무튼 위안스카이의 깽판은 계속되어 량치차오 은퇴 이후에도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용과 황제 참칭같은 무리수를 뒀고, 이에 량치차오는 차이어를 앞세워 탕지야오와 함께 호국전쟁을 일으킨다.(1915년) 양광 지방 총독들이 반원파로 돌아선것, 진압하러 왔던 펑궈장이 반원파로 돌아선 데에도 량치차오의 말빨이 한몫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당시 위안스카이가 캉유웨이에게 제자를 설득해라고 요청했는데, 캉유웨이는 이걸 들어주는 척하면서 량치차오를 찾아가 이참에 청조 복벽을 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량치차오가 이걸 거절하면서 사제관계는 더더욱 씹창남 위안스카이의 운지가 확실해지자, 승기를 잡은 량치차오와 차이어는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을 수장으로 하는 정부를 요구했고 북양군벌들도 이를 수용했다. 이때부터 량치차오는 돤치루이와 붙어먹게 된다. 리위안훙은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특이한 군벌이었지만 실권이 좆도 없었다. 애초부터 량치차오랑 펑궈장의 지지 없었으면 그 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을게 리위안훙이었다. 반면, 돤치루이는 실권이 컸고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크게 반발한걸로 인해 당시까지만 해도 개념인 취급받는 인물이었다. 량치차오는 아직도 '과격한 국민당을 냅두면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날 확률이 높을 것이고 차라리 북양군벌로 제어하는게 낫다'<ref>뭐 북양군벌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나름 일리있는 말이다</ref>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엔 돤치루이 편에 섰다. 그는 돤치루이 정권에 협력하여 국민당과의 정치투쟁에 앞장섰고, 서구식 헌법 제정을 시도했으며, 독일은 병신이고 영미가 짱이라면서<ref>근데 초기엔 독일 편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무리봐도 답안나오니까 돌아섰음</ref> 연합국에 가입하라고 부추겼다.(당시에는 열강들 싸움에 중국을 팔아먹는다고 매국노 소리 들었지만 이 덕분에 중화민국은 1차대전 승전국이 된다. 명목만 승전국이고 실제취급은 병신이라는게 문제였을뿐) 국민당 견제와 연합국 가입까지는 좋았다. 반면 돤치루이 역시 독재 유망주 군벌 매국노였던지라 헌법 제정은 시원하게 망했다. 이때부턴 단씨네 개새끼 소리도 듣게된다. 여튼 헌법 제정이 좆망으로 끝난 후, 량치차오는 슬슬 방향을 돌려 정치 문제에서 손을 떼고 재정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러다가 1917년 7월, 리위안훙은 돤치루이 견제한답시고 장쉰<ref>하진이 십상시 견제한다고 동탁 데려온거랑 비슷하다</ref> 을 불렀는데, 장쉰 이새끼가 뜬금없이 청조복벽을 시도했다. 이에 복벽에 반대했던 량치차오는 복벽주의자들을 존나게 깠는데 이중엔 옛 스승 캉유웨이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스승님께 빌빌 기었겠지만 이미 시대는 달라져있었다. 그는 '강가에서 노니는 노인네가 의기양양 강경하게 대들며 인민을 배반하고 도적의 앞잡이질을 한다'<ref><이거 때문에 캉유웨이의 별명이 '의기양양 강경하게 대드는 강가 노인네'가 된다</ref>, '허풍을 떨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늙은 서생은 정국의 고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복벽파는 위안스카이와 똑같은 매국노이니 복벽파를 타도하는건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캉유웨이를 강력하게 디스했다. 이걸 들은 캉유웨이는 당연히 틀니를 딱딱대며 '어린놈이,,, 웃어른도,,,스승도,,, 모르느냐~~'하면서 격노했고 결국 둘은 죽을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ref>캉유웨이 뒤지기 1달전에 편지 써서 용서를 구했지만 답장을 못받았다</ref> 아무튼 장쉰의 복벽은 다른 군벌들의 다굴을 맞고 망했다. 심지어 리위안훙도 장쉰을 줘팼다. 장쉰이 운지한 후, 리위안훙은 장쉰을 부른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그를 대신해 펑궈장이 전면에 나섰고 돤치루이의 권력이 더욱 확고해졌다. 원탑이 된 돤치루이는 장쉰 진압에 공을 세운 량치차오를 재정장관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북양정부의 막장스러운 재정은 량치차오가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군비가 예산을 초과하는데 지가 뭔수로 해결하겠는가?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걸 해결하긴 불가능했고 결국 '호국전쟁보다 더 어렵다'라고 한탄한다. 이에 돤치루이는 '서생 주제에 실제 정치에 대해 뭘 알겠나'라며 능욕했다. 이러던 와중에 이번엔 쑨원이 매국 독재자 돤치루이와 그 시다바리 량치차오를 타도하겠다면서 호법전쟁을 일으켰고(1917년 9월) 이로 인해 돤치루이가 사퇴하게 되면서 덤으로 짤린다. 얼마 후 쑨원을 역관광 보내고 복직한 돤치루이가 그에게 복직을 제안했으나, 량치차오는 매국노 취급 + 군벌정치에 환멸을 느껴 결국 다시 한번 정계은퇴를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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