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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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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 3.1 운동의 뽕에 취해서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4월 11에 세워졌고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 이때 만들어졌다.) 한성 임시정부는 23일에 세워졌다. 다만 한성 정부는 사실 서류 상으로만 존재했다. 나중에 독립하고 나서 "우리는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했으니까 독립하고 나면 우리가 나라 운영해나갈 자격이 있다."라고 떳떳하게 얘기하려고 서류로만 존재하는 정부를 '만든' 것이다. 교과서에서 이름만 나오고 행적이 따로 묘사되지 않는 게 그 때문이다. 한성 임시정부는 집정관 총재라는 폼 나는 자리에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추대했다. 이후 9월 11일,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독립 운동 세력이 상해에 모여서 단일 임시정부를 세우고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한다. 그리고 "대한으로 한 번 망했으니까 이번에는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독립운동가 신석우의 의견에 따라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정부를 발족하... ...기 직전에 문제가 생겼다. 초대 국무총리 임기 마치고 미쿸으로 갔던 런승만 박사가 President of Korea라고 적힌 명함을 뿌리고 다녔는데, 통합된 임정에서 대통령 안 시켜주면 임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염병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임시 정부의 형태는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의정원(입법부)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가 이뤄지는 내각책임제로 하려고 했는데 국내외에서 이름값이 높아져서 임정에게 꼭 필요했던 리승만이 이에 거부한 것이다. 싱먼 리를 달래기 위해서 급하게 대통령 자리를 만들고 체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꿨다. 교과서에서는 편의상 처음부터 대통령중심제였던 걸로 나온다. 어차피 이제 와서 크게 상관이야 있느냐만. (이 병신 같은 행태는 1948년 8월 15일에도 반복된다.) 임정이 상하이에서 통합됐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 황제의 5째 아들(의친왕 이강)은 임시정부에 혹시 자기도 끼워줄 수 있겠냐는 내용의 밀서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만주까지 이동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본 순사에게 걸려서 송환 당하고 만다. 밀서의 내용은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 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였다.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에서 나오는 내용임.) 의친왕은 형제를 잘못 둔 덕분에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이 묻히고 '죽을 때까지 평생 잘 먹고 잘 산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물론 잘 살기는 개뿔 해방 후 런승만이 버리고 6.25때 도망다니다 말라 죽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임시 헌장의 내용을 보면 현실성 없는 내용이 하나 있다. {{인용문|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제7조}} 어느 정도 예상은 되겠지만 대한민국은 결국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 그래도 임시 헌장의 한 가지 의의가 있다면 반포일을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표기한 덕분에 건국절 논란을 종식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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