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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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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s [[알렉산드로스 3세]] === ==== [[기원전 334년]], 전쟁 시작 ==== 한편 같은 해인 기원전 336년, 서쪽의 떠오르는 해였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는 그리스를 통일한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하고,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2년 동안 그리스의 내분을 정리한 다음, [[기원전 334년]] 그리스 전체의 국력을 모아서 페르시아를 쳐들어갔다. 페르시아군은 [[멤논]]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배신 전적 때문에 유능한 멤논의 의견을 묵살했고, [[5월]]에 벌어진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렇게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가 한순간에 마케도니아에게 넘어갔고, 결국 멤논을 사령관으로 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멤논은 얼마 안 가 죽었다. ====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의 패배 ==== 이듬해인 [[기원전 333년]] [[11월]],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는 페르시아를 더더욱 압박했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는 시리아의 이소스에서 대치했고, 이 자리에서 [[이소스 전투]]가 벌어졌다. 수는 페르시아군이 더 많았고 페르시아군은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전술을 구사했으나, 알렉산더의 뛰어난 전략으로 이소스 전투는 알렉산더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 다리우스의 가족들이 알렉산더군에게 붙잡혔다. 이제 페르시아의 멸망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 [[기원전 332년]], 이집트 상실 ==== [[기원전 332년]]에는 이집트를 빼앗겼다. 당시 이집트는 페르시아에 대한 배신의 대가로 [[이집트 제31왕조]] 치하에서 11년간의 폭정을 겪고 있었는데,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이집트는 해방되었다. 이후 파라오의 자리도 다리우스 3세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로 넘어갔다. ====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의 패배와 제국 붕괴 ==== [[기원전 331년]], 제국의 핵심 거점인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온 알렉산더는 제국을 정복하기 직전까지 왔다. 다리우스 3세도 알렉산더를 막기 위해 영혼을 끌어모아 수만에서 최대 십몇만에 달하는 군인들을 소집했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와 알렉산더는 맞붙었다. 이때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부대가 페르시아군을 격파했고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가 다리우스를 발견하고 추격해오자 다리우스는 알렉산더를 피해 달아났다. 샤한샤가 도주하자 많은 페르시아 군인들도 빤쓰런을 시전했다. ==== [[기원전 330년]],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 ==== 빤쓰런한 샤라는 불명예를 얻은 그는 제국 동쪽의 박트리아까지 도망갔으나, 그곳 총독이었던 [[베소스]]에게 붙잡혀 왕위를 넘길 것을 강요받았다. 다리우스는 베수스의 요구를 거절했고, 결국 베수스에게 살해당했다. 사실상 이 시기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멸망한 것이나 다를 바 없으며, 다리우스를 죽인 [[베소스]]는 스스로 샤를 선포했으나 얼마 안 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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