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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과 미군정의 수립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지금 문프(쑻)의 반일선동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일본의 만행에 분노해 일어난 반일감정이 만연해있었다. 온갖 친일파들이 관공서에 숨어있다 끌려나와 맞아뒈지는 등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무조건 일본 관련된 것만 패면 그만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아직까지는 조선의 행정을 담당했으나 일본 본토로부터 버림받아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여운형의 5대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대부분의 권리를 건준위에 이양했고 광복 이후 조선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일만 담당하게 되었다. 본래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대한민국이 정치를 이끌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 서울로 진주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미군은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을 설치해 3년 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은 건준위의 행정권을 잠시 조선총독부에 되돌렸으나 얼마 안 가 총독부를 폐지하고 미군정이 가져갔다. 이 시기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한국민주당]] 등의 정당들이 창당되어 오늘날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머한민국이 올 거라는 환상이 존재하던 시기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끈 미국은 민족, 공산 할 것 없이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탄 초인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신탁통치에 반대해 잘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12월에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좌우익이 각각 찬탁과 반탁으로 갈리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1946년]]은 좌우익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시기다. 온갖 백색테러가 만연하고 길 가다가 운 나쁜 놈은 총 맞아 죽을 정도로 아주 피터지게 싸웠다.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참여할 정치 세력들을 고르는 과정에서 대립해 결렬되었다. 결국 이승만은 6월 3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이라도 독립하자는 의견을 낸다. 이에 반발한 통일론자들은 좌우합작운동을 펼쳤으나 극우 및 극좌의 테러로 번번히 실패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이미지가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9월 노동자 총파업, [[대구 10.1 사건]]을 통해 판도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돌아갔다. 집권 중이던 미 육군과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으니 여러모로 민족주의 측을 밀어줬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은근슬쩍 정계에 돌아오기도 했다. [[1947년]]이 되자 미국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존나게 쳐맞았던 공산주의자들은 스카이랜드로 관광을 보내졌거나 북으로 빤쓰런했다. 좌익 활동은 금지되었고 좌우합작도 여운형 암살 사건으로 사그라들었다. UN은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을 치루기로 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남한에서만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맘때 이승만이 본격적으로 정부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백성 또는 국민들 사이에서 '새 나라의 국부'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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