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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점 == 하지만 독립군의 과장된 기록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남는다. 1.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 한국 측 주장대로 네 자릿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했다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3.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4.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5.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 할 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6. 한국 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 7.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8.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9.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10.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이 1930년대 이후의 것이다. 따라서 그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후대에 찍힌 것이다. 그래서 한국 측도 이제 네 자릿수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팩트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1번은 19사단 보고서에는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번은 야스쿠니 신사도 누락되는 등의 이유로 전사자를 빼 먹는 사태가 얼마든지 일어난다. 물론 3000명쯤 되는 걸 빼먹기는 힘들지만 십여 명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 7번은 독립군의 목적이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거였고 청산리에서 전투를 벌인 것도 추격해오는 병력을 따돌릴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서 후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작전 목표가 독립군을 섬멸하는 건데 이걸 실패한 이상 일본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굳이 따진다면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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