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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대한제국이 일제에 먹힌 후 일본은 도시에 많이 사는 일본인과 시골에 많이 사는 조선인을 차별하기 위해 도농분리를 실시한다. 창원도 예외는 아니라서 시가지가 있는 마산이 떨어져나갔다. 마산은 일본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게 되면서 크게 발전했다. 진해도 일본이 계획도시로 만들긴 하나 창원에서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해방 후 일본과 농촌에서 사람들이 오고 6.25전쟁 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마산의 인구수가 크게 늘어났다. 진해도 전쟁 이후 창원에서 독립하게 된다. 1960~70년대는 마산의 전성기로 이때는 전국 7대 도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도 이때 일어났다. 시가지 다 떨어져나가고 남은 창원의 쪼가리는 1970년대 이전에는 그냥 허허벌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대 박정희가 남동임해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창원에 줄 긋고 심시티를 만들게 된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캔버라의 특징 중 하나가 도시가 기능별로 구역이 나뉘어져있다는 것이다. 교육지구,공업지구, 상업지구 등으로 나뉘어 있는데, 창원도 처음에 그렇게 만들 의도로 설계했다고 한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창원에는 캔버라처럼 고층빌딩이 없었는데, 이제는 규제가 풀려서 고층 주거단지가 늘어나고 있다. 창원이 개발되면서 마산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 KBS,법원,검찰청 등의 관공서가 창원으로 옮겨가고, 부산에서 도청이 이전할 때 마산이 진주와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는데 결국 창원으로 가 버렸다. 상권도 점점 위축되어 창동 일대는 망해버리고, 50만 인구 시절 가졌던 구가 인구 감소로 폐지되었다. 반면 창원은 당초 예상인구인 30만을 훌쩍 넘겨 1997년에 이미 구를 설치할 수 있는 인구수를 가지게 되나 대동제라는 행정조직의 첫 시범 대상이 되어 인근 동끼리 통폐합만 하고 구는 만들지 못했다. 결국 2010년 마산은 진해와 함께 다시 창원으로 들어간다. 창원이 통합 시 지원되는 예산을 적게 가져가는 대가로 이름을 보전하였다. 통합 전에는 세 도시를 합해서 마창진(진마창, 창마진은 잘 안 쓰였음)이라 불렸지만 요새는 잘 안 쓰인다. 애초에 하위 지명이 상위 지명과 나란히 놓일 수가 없다. 가령, 부산 동래, 부산 해운대라는 말은 있어도 부산-동래-해운대라는 말은 말이 안 되듯이 창원 마산, 창원 진해라는 말은 가능해도 마산-창원-진해는 이제 말이 안 된다. 몇몇 지역 정체성이 강한 마산, 진해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창원 산다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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