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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주 === 문관 지휘관이나 무관들이 입었던 갑옷은 현재 유물로도 여러 점이 남아있어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지만 과연 일반 병사들은 어떠했는지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딱히 일반인의 양식 수준으로는 어떠했을지 알 수가 없다. 그 대략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아래 중종34년의 기록, 육군박물관의 흉갑, 그리고 일본 야스쿠니 신사 조선군 흉갑 1점 전시물을 보면 조선의 일반 병사들은 지갑, 흉갑 등을 착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있었던 서양 선교사 프로이스는 조선병들이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라고 한 바 있어<ref> 다만 프로이스의 기록은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 </ref>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로이스의 기록 외에도, 조선군이 가죽제 갑옷을 활용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지방 각 현에서 작성한 읍지를 보면 수군용으로 '''피갑주皮甲冑''' 가 비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이다.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num=93450]] 갑옷의 형태 참고[[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v09&articleno=15854902&categoryId=683307®dt=20100926045831]] {{인용|(중종 34년)..군장을 점열하는 일을 일시에 거행하면 '''지갑(紙甲)'''하나의 값이 1동 베 50필에 이르고, 말 한 필 빌리는 값이 베 30∼40필을 넘게 됩니다. 다른 장비의 값도 다 이와 맞먹을 터이니 재산이 넉넉한 자는 이미 갖추었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자는 찌든 가난에 울부짖을 뿐인데 어떻게 이들에게 준비하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지갑은 좀먹기 쉽고 빌린 말은 점열이 지나면 즉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군졸만 괴롭게 하고 나라의 방어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만일 국가에 급히 간열할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급한 경보도 없으며, 하늘마저 재변을 보여 주는 때인만큼 임금이 친히 교외로 나가서 군장을 점열함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성명을 거두소서.}} 중기에 이미 병역제도, 군포징수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개인이 마련하는 것이든 국가가 마련하는 것이든 방어구의 준비 상태는 좋지 못했을 것이고 이마저도 형편이 되는 사람은 입고, 아닌 사람은 입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조선군은 아예 갑옷을 입지 못한자, 흉갑이나 지갑, 피갑을 걸친자, 전시에 국가가 만들어 지급하는 두정갑 을 입은 자 등 상당히 제각각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에 비해 직업군인인 갑사나 문, 무 지휘관들은 두정갑, 경번갑, 찰갑, 쇄자갑등을 입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정확히 고증하고 싶다면 전립과 투구를 제각기 쓴 병사 + 그리고 지갑과 피갑 및 두정갑을 입거나 애초부터 아무것도 입지 않은 병사 를 전부 등장시켜야 할 것이다....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포졸복, 웨이터복은 조선 후기에 화약무기가 주요 무기가 되면서 갑주의 중요성이 감소해 입게 된 것이다. 사극에서 포졸복을 입은 조선군을 보고 기분이 다운되는 역덕후들이 많지만, 사실 조선 후기 조선군 고증으로는 틀린것도 아니다. 조선 말에는 방탄복의 일종으로 면갑을 보급하기도 했는데, 미칠듯한 더위에다가 물에 빠지면 대책이 없어 그다지 많이 쓰이진 않았다. 19C 무렵부터는 이미 보병들이 방어구를 입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서구에서도 퀴러시어 기병이 3MM정도의 경갑을 착용한 것 외에는 전투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좀 역좀알의 시점에서 쓰자면 조선시대 철갑옷 안쓴건 이걸 만들 기술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58430 논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철갑이 굉장히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이 보통 조선시대 철갑을 잘 안쓰는 줄 아는건 걍 막장 사극 때문이고, 실제로는 철갑 내지는 나무에 철 붙인 갑옷을 썼다. 철갑은 그렇다치고 왜 나무와 철을 결합해서 썼나면 일차로 싸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철이 열전도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시대 갑옷의 사용환경은 추위가 하늘을 찌르는 북방이었는데 여기에 철갑입고 가면 누가 얼어 뒤지라고? 거기다가 철은 열팽창률도 높다 나무의 경우 내부 조직에 틈이 많아 열팽창으로 인한 부피증가를 충분히 상쇄 가능하지만 철로 만들면 혹한의 추위에 빵빵 금가는 꼬라지를 볼 수 있을거다. 물론 조선 초기 환경에서 왜구가 들끓는 시점에서는 전장환경이 대체로 따뜻한 남부였고, 설령 남부 아니더라도 빈번한 싸움으로 인해 생존률이 우선시되어 철갑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진관체제-제승방략-속오군을 거치면서 10만명 이상의 무기를 사전에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누가 제승방략에 대해 예비군 개념이고 실제 상비군은 적었다고 하는데, 일단 걔네들한테 줄 무기와 갑옷 자체는 상비해 두고 있어야 하므로 필요한 갑옷 수가 달라지진 않는다.) 요는 10만 개 이상의 갑옷을 미리 만들어두어야 했으며, 더군다나 유럽과는 달리 이 비용은 중앙에서 각출하는 것이었으므로 - 요컨대 세금 나간다는 말이다 - 참고로 동시대 유럽에서 갑옷 비용과 종자는 기사가 직접 냈다. 물론 영주가 갑옷 사라고 돈을 보태준 기록도 있고 기사들도 지들 장원 있었지만, 지 갑옷 살 돈 없어 파산한 기사들도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디까지나 성과에 따라 차등지불이었던 듯 하다. 보급성을 심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 중기 들어 전란이 많이 줄었으므로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쓸데없는데 돈나간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서양의 판금갑옷은 그 가격에 있어 굉장한 사치품이었으며, 실제 하급 기사 중에 영지가 가난해서 갑옷 살 돈이 없어 적당한 피갑 입고 싸웠다는 애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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