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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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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48년 10월 중순 경에 이르러, 이승만 정부의 진압군은 해안선에서 5km 너머에 있는 모든 주민들에게 소거령을 내리고, 해안으로 내려오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 취급하여 학살을 시작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40년대는 아직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 기반 사회였으며 그만큼 주민들이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살던 땅에서 쉽게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이윽고 서북청년회가 증원 되고, 해안선 5Km 바깥을 '적지'로 판단하게 된다.(서북청년회나 군경들 입장에선 적지로 판단한 지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로당무장대에게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간주했다.) 1949년 봄까지 '적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여 작전을 벌였는데, 말 그대로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장대를 진압하는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전체 희생자의 80%이며 이중 대다수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남로당 쪽 주동자가 김달삼이라는 놈인데 이 새끼는 대구에서 10.1 사건에 참가하고 이것 때문에 제주도로 다시 들어왔다가 4.3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서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태 수습이 안 되어서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때 정선군 여량면(아우라지 있는 곳)에서 목 잘리고 뒤진다. 이 새끼 때문에 4.3 사건이 일어났고 참혹한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김달삼 이새끼가 아니었으면 단순한 민간인 시위사건으로 일단락되어 무고한 산간지대 양민들까지 피해볼일도 없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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