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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고초려 부터 유비 황제 즉위까지 ===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그를 군사에 임명하여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후한|한실]]을 부흥할 수 있을지 물었고 제갈량은 [[손권]]과 동맹하고 [[형주]]와 [[익주]]를 얻어 국력을 닦고 중국을 침범하는 오랑캐들과 화친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중원의 변란을 틈타 형주에선 한명의 상장으로 진군하게 하고 익주에선 유비 본인이 진천(관중)을 노려 진군하여 천하를 평정할 것을 진언하니 이 계책이 후세에 유명해진 [[천하삼분지계]]이다. 이를 듣고 유비가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신하로 삼아 중히 여기니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는데 유비가 다독이며 공명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것과 같다하니 이들이 불평을 멈추었고 이를 후세에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불렀다. 이후 [[유표]]의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진 유표의 아들 유기가 목숨을 구할 계책을 얻기 원하자 제갈량이 살 방법을 알려주고 유기는 이를 따라 강하 태수가 되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유종]]은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이때 서서도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으니 서서가 어쩔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떠났다. 이후 유비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손권]]과 동맹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 손권도 유비와 동맹할 목적으로 유비에게 [[노숙]]을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노숙과 함게 동오로 떠나 같이 손권을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 싸우길 결의하였다. 이후 유비와 손권 동맹군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뭐 동남풍을 부르고 신선노릇 난리 부르스를 쳤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서 외교관 노릇한게 끝이다. 연의에 안 나오는 에피소드 가운데는 주화파의 리더 [[장소]]가 의외로 제갈량을 높게 봐서 '님 유비 버리고 손권님에게 출사하는게 어떻겠음?' 라고 했는데 제갈량이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화용도에서 조조 잡으라고 한거? 그딴거 있지도 않았고 강릉 뒷치기 해서 뺏은건 연의 드립이고 실제로는 유비와 주유가 같이 싸운 이후 오나라가 유비에게 양도한 것이다. 뭐 연의가 뻥튀기를 존나게 하긴 했지만 주유의 미인계를 간파하고 유비를 말린건 어느정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때 유비는 형남 4군을 취했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이때 [[방통]]을 추천하고 유비한테 뒤질뻔한 [[장완]]을 구해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자 유비가 떠난 형주를 [[관우]]와 함깨 다스리면서 후방을 지켰고,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동오로 떠나는 것을 막았다.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기세 등등했던 연의와 달리 제갈량은 개인적으로 관우에게 쩔쩔 맨건지 마초가 항복하자 '그 새끼 어느정도임?'이라고 물은 관우에게 '님이 더 쩔고여 님하텐 안됨' 이라고 하거나 유비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임명할때 '황충이 [[하후연]]을 때려잡았긴 했지만 관우가 황충을 인정 안할텐데 관우 배려해 주시져.'라고 유비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하긴 유비군 입사 초창기에 관우, 장비에게 쪼인트까였으니 몸 사릴만도 했을것이다. :ㄴ 그럼 법정이 장비 쪼인트 깔 때 살살 달래던 건 뭐임? 아무리 법정이 익주 주요 인사였고 성격 개꼬장이던 놈이라도 주군 의형제하고 동급이냐? :ㄴ 장비 쪼인트 깐놈은 유파지 법정이 아니다. 그리고 장비는 기본적으로 사대부를 존중했는데 유파가 개꼬장부려서 나중엔 유비까지 "개새끼야 조조한테 그렇게 가고 싶냐? 니 써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빡쳐서 화내기까지 한 사건이다. 이건 유파가 개또라이 새끼라 그런거고 장비가 사대부를 공경했고 제갈량이 특별이 유파의 재능을 아껴서 발생한 일이다. 어쨌거나 유비가 가맹관에서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유비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그러니까 한중공방전에선 제갈량은 후방에 처박혀서 군수물자를 댄거고 실제로 한중에서 유비의 난리부르스를 도운건 [[황권]]과 [[법정]]이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이후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가 황제에 오르라는 제신들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제갈량이 황제에 오를것을 권하였고 유비는 황제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엔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223년]] 봄,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켰던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는 영안(永安) 백제성에 머물다가 병이 깊어져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으며 제갈량에게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니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신하로서 헌신하여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한다. 이에 유비는 [[유선]]에게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여기라는 말을 남기고 승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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