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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 [[File:Minamoto no Yoritomo.jpg|300px|thumb|right|일본 최초의 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 국가의 중앙집권체제와 강력한 지방세력의 공존이라는 모순적인 권력구조 상황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켰고, 결국 장원체제 하에서 발달한 무사 계층이 12세기에 왕과 중앙귀족을 나가리로 만들고 지들끼리 나라를 해쳐먹게 되었다. 일본의 권력을 차지한 무사들은 천황과 중앙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헤이안의 기존 조정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키는대신 무사들을 축으로 하는 또 다른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는데 그 군사정부를 '막부'라고 부른다. 최초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로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설립되였다. 미나모토 가문은 절치부심 끝에 다이라 가문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일본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그 권력이 미약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실질통치력이 미쳤던 지역은 일본 동부의 일부 지역들뿐이었고, 대부분의 지역은 사실상 막부의 통치권력 바깥에 있는 지역유지들의 소왕국들이었다. 결정적으로 13세기 [[몽골|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카마쿠라 막부의 재정이 소진되어 쇠퇴해버렸다. 가마쿠라 막부의 세력 약화를 감지한 조정의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앞세워 막부에 황금 죽창을 선사하여 이를 멸망시켰으나, 죽창질의 선봉장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통수를 쳐서 결국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와 함께 사이좋게 망하게 된다.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고다이고 천황이 수도인 교토를 버리고 교토 남쪽의 요시노에 분조를 수립함에 따라 일본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조정이 둘로 나뉘게 되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분조인 남조는 얼마 가지 않아 아시카가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 일본의 새로운 집권자가 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의 '무로마치'라는 금수저 동네에 막부를 차리는데, 이 막부가 '무로마치 막부'이다. 무로막치 막부는 일본 역대 막부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정권에 속하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를 창업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나 에도 막부를 창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막부 설립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자체세력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토대로 다른 지방충들에게 강제력을 동반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나모토나 도쿠가와와는 달리 아시카가는 지방세력에 강제력을 행사할 능력이 종범이었기 때문에 지방세력과의 친밀도를 올리는 친목좆목질로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 취약한 중앙권력 자체가 훗날 [[센고쿠 시대]] 도래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들어선 이래로 일본은 왜구문제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가 [[조공|조공무역]]제도를 도입함으로 인해 명나라와의 무역로가 막히는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타격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나라]]에 조공을 하여 책봉까지 받고 감합무역을 하려고 굽신거렸으나 명나라의 일본 취급은 여전히 안습했고 중국에서 왜구활동은 지속되었다. 외교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내부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상기한 대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구조는 매우 취약하였고 결국 오닌의 난이라 불리는 지방충들의 세력다툼을 막부가 중재하는데 실패하여 국가는 사실상의 무정부상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전국에서 다이묘들이 미쳐날뛰게 된다. 이 각지에서 소규모 다이묘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였던 시대를 전국(戰國) 시대, 일본어로 센고쿠 시대라고 부른다. 센고쿠 시대에 영지 내 군소세력들을 잘 수습하고 두각을 드러낸 다이묘로는 [[오다 노부나가]], 타케다 신겐, 우에스기 켄신이 있었다. 하지만 타케다와 우에스기가 사이좋게 병걸려 뒤진 덕분에 라이벌이 사라진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할 뻔했다. 하지만 심복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혼노지에서 통수를 맞고 구워졌고 일본의 통일은 노부나가의 밥상에 가장 먼저 숟가락을 얹은 오다 노부나가의 심복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달성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저를 빠르게 얹기는 했지만 근본없는 똥수저 출신이었고, 라이벌인 은수저 출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빵셔틀 경력이 더 길다는 점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할 명분이 취약했었다. 실제로 도요토미가 노부나가가 남겨놓은 세력을 장악하자 동쪽의 도쿠가와는 딥빡했고 결국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카츠와 팀먹었기 때문에 명분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지의 규모도 도요토미 직할령보다 도쿠가와의 직할령이 더 컸었고 실제로 도요토미 군과 도쿠가와 군이 맞붙은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군이 우세를 점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고 도쿠가와의 통수를 치는 트롤링을 선사하자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에 대항할 명분을 상실하고 이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최대의 라이벌을 격퇴한 도요토미는 최후의 반항세력인 시마즈 세력과 후 호죠 세력을 정리하여 일본을 완전통일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세력권을 일본 열도를 넘어 대륙까지 확장하고자 본인의 최측근 다이묘들을 앞세워 조선과 명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본인은 병사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가문은 그 세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는데, 이는 무로막치 막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의 통치기반이 취약했고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를 엿보며 칼을 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통수를 세키가하라에서 멋드러지게 치고 일본 동부의 칸토 평야에 위치한 도시인 에도에 막부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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