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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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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 '유교'의 본질적 한계== '''1.유교(儒敎)''' 유교(儒敎)라는 말처럼 조선식 유교는 유학이 아니다. 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이다. 원래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는 나이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적이 없다. [[갓플란트|공자의 가르침은 연장자가 나이 어린 자에게 대우 받고 싶으면, 먼저 그 본을 보이고 존중하라 가르쳤으며,]] [[틀딱|특히 나이만 먹고 좃도 이룬것도 없는 새끼들은 배울 점도 없으니 개무시하는게 답이라고 했다.]] 이처럼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공자는 무지한 동양인들을 계몽시키고자 노력했으나 [[공산주의|그 수명이 다해 죽음으로, 결국엔 그 제자들에 의해 그 가르침이 곡해되기 시작한다.]] 본래 학문이란 누구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이 맞다면 동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에 의해 기존 학문과 학설이 수정되기 마련이다(이게 유교와 서양 철학의 본질적인 차이다.) 하지만 유교의 '敎 가르칠 교'라는 한자 뜻처럼. 의견 개진은 허용되지 않고 원래의 것을 보고 따르기만 하라고 강요하던게 공자와 그 제자들이였다. 원래의 가르침을 토씨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종교의 경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즉 이 유교라는건 공자 사후에 사실상 학문이 아닌 종교의 영역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송나라의 주희 새끼가 지 멋대로 공자의 가르침에 주석을 달아 본격적으로 왜곡하기 직전까지는 유학의 근본은 흔들리지 않고 이어왔으나, 송나라의 방구석 좃병신 주희 새끼가 공자의 가르침을 담았다고 구라 깐 주자학(성리학)이 탄생하면서 [[만악의 근원|우리가 아는 유교 탈레반이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단 주희는 공자가 세상에 관해 논하기 전, 수레와 말을 타고 천하를 주유하고 유람하며 깨달은 바를 방구석에서 책 몇 권 읽은 주제에 '나는 공자만큼, 아니 그 이상 아는 사람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낡았다'는 명분하에 멋대로 왜곡하기 시작했는데, [[스탈린주의|이 왜곡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힘 가진 이(권력자, 귀족, 연장자 등)가 그렇지 못한 이를 핍박하고 착취하는데 그럴듯한 명분을 주는 방향으로 왜곡되기 시작된다.]] 이딴 좃병신같은 사이비 유학을 물고 빨고 그대로 수입한 이가 있으니 그게 바로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이다. 이 새끼들은 불교의 폐단을 까면서, 또 다른 폐단인 성리학을 들여와 지들이 지식인입네, 선구자입네 하면서 설쳐대다가 결국 고려를 전복시키고 주자학의 나라 조선을 건국한다. 근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성리학에 근간하여 세워진 조선은 정상적인 국가였다. 그것은 바로 정도전 때문이였는데, 정도전은 태생이 꼬장꼬장한 마이웨이 독불장군 스타일이라 주희 새끼가 뭐라고 지껄였든, 옛날 서책에서 뭐라고 지껄였든 헤아려 생각해 봤을 때 이치에 맞지 않으면 좃나 까내리고 수정하던 사람이였다. 당장에 사대부라면 철칙으로 여겨야할 '주례'의 고공기편에 나오는 도성의 설계 원칙을 "좃까는 소리다 이거. 한양의 지세를 보니 이대로 도성 만들면 그게 개판이지 도성임? 지랄 ㄴㄴ"하고 실정에 맞게 수정하도록 밀어 붙힌게 정도전이였다. 원래 주례 고공기에 의하면 도성의 설계 원칙은 전조후시(前朝後市)라 하여 궁궐 뒷편에 시전을 세우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서울의 지형을 보면 조선의 법궁 경복궁 뒷편으로는 북악산이 위치하고 있다. 즉 고공기 원칙에 따라 경복궁 뒷편에 시전을 세우면 사람들은 물건 사려고 매번 등산을 해야하는거다. 그런데도 좃병신같은 사대부 새끼들은 그 원칙을 고수해야 된다고 바락바락 우기는데 정도전만은 좃까는 소리 하지 말라며 자기 자신의 의견을 밀어 붙혔고, 정도전을 자신의 동료이자 그 이상으로 여긴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의 도성 한양과, 궁궐 등의 배치는 모두 정도전의 뜻을 주축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이는 속 좁은 애미 뒤진 윾교 탈레반 사대부 새끼들의 열등감을 증폭시키니, 이후 윾교 탈레반 사대부들은 이방원에게 달라 붙어 정도전과 척을 지고 종국에는 정도전을 죽여 없애며, 조선의 기틀을 유교 탈레반이 다지게 만든다. 또한 정도전이 이상으로 여겼던 유학의 나라(사이비 성리학의 나라 아님)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선진적인 국가여서 누구나 능력만 출중하면 과거에 응시하고 급제하여 지배층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만들고자 했는데 정도전 사후 유교 탈레반 새끼들에 의해 강상의 법도니 반상의 유별이니 지랄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가난한 민초들이 개천에서 용 날 기회를, 즉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린다. 그나마도 이런 유교 탈레반들의 악정을 [[세종]]과 같은 성군이 나서서 브레이크를 걸어 버리는 바람에 나라가 일정 수준 이상 돌아갔는데 이는 조선 중기에 와서 그나마도 없어지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2.현대 유교 탈레반의 실질적 뿌리 = 율곡 이이'''''' 조선 초중기의 양대 세력 []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에서 결국 사림이 압승을 거두므로 인해 조선의 정국은 사람이 장악하게 된다. 사림은 이후에 반으로 갈라져 [[붕당 정치]]의 서막을 여는데 이 붕당 간의 대립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서인이고. 이 서인의 실질적 기틀을 다 잡은 이가 바로 5000원짜리 율곡 이이 좃같은 새끼다. 일단 좃곡 이이는 좃사임당인 지 애미 집안의 배경으로 인해 태생부터 고생이란 모르고 자란 핵금수저 새끼였다. 이 새끼는 단순한 암기 머리는 비상하여 구도장원공과 같은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경전을 달달 외워서 과거에 여러번 급제한다. 근데 딱 여기까지였다. 암기 머리(공부 머리)와 실질적인 지략과는 엄연한 별개다. 이 새끼는 위정자로써 갖추어야 할 덕목, 현실감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좃문가 새끼 그 자체였다. 이 새끼의 최종 관직이 재상의 반열이 아닌 이조판서임을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본래 이조판서란 조정의 정치놀음에서 승리한 붕당의 얼굴 마담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당대의 집권층인 동인은 실질적인 사림의 직계였는데, 이를 아니꼽게 본 훈구파 잔존 세력들이 갑자기 개소리나 씨부리면서 내가 천재입네하고 나타난 이이와 그 도당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 인해 이이는 득세하게 되고 결국 얼굴 마담으로 이조 판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아무리 서인이 득세한다고 해도 이딴 좃병신 방구석 좃문가 새끼를 국정 운영의 총책으로 삼기엔 자기들도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니 자체적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이 현실감이라곤 1도 없는 이이 새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게 바로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인데 십만양병설은 "머지않아 국가의 큰 환란이 닥칠 것 같으니까 병사 10만명 더 늘리고, 훈련시켜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딴걸 업적이랍시고 추숭한게 서인 세력인데. 율곡 이이의 양병설에는 가장 중요한 How, 즉 어떻게가 빠져있다. 10만의 군사는 어디서 징집할 것인지(농업이 국가 기간 산업이던 조선의 경우 군사의 수를 늘린다는 거는 농번기에 생산량 저하와 백성들 좃빠진다는 소리랑 똑같은 소리다) 그 10만의 군사들을 먹일 양식(군량)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10만의 군사들의 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려가 단 한 마디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국방에 대해 좃도 무지한 좃문가 새끼가 한 마디 씨부린게 이 새끼 최고 업적이다. 거기다가 이 좃문가 새끼의 말을 따라서 십만의 병사를 무리해서라도 양성해 냈으면 그 직후의 환란인 임진왜란의 초전 졸패를 면할 수 있었을까? 정답은 아니다. 조선 군제의 실질적 문제점은 [[북한|지방 군란은 우려한 중앙 정부의 삽질]]로 중앙 지휘관이 전장에 당도하여 지휘하기 전까지는 모든 군대가 방방곡곡 흩어져 있고, 지휘 체계도 일원화되지 않은 오합지졸임에 있었다. 임란 초기에 일본군한테 대패를 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각개격파 당하는데 군사의 수가 뭐가 중요하냐. 이런 실질적 문제점을 다 제쳐두고 쓰잘대기 없이 군사만 늘리자고한게 좃곡 이이 새끼다. 이런 위정자로서의 자질도 갖추지 못한 좃곡 이이 새끼는 사대부로서의 자질도 부족한 애미 뒤진 새끼였다. 좃곡 이이의 애비인 이원수는 뿌리만 양반이지 사실상 좃도 없는 가난한 잔반이였는데 그에 비해 애미인 신사임당은 강릉 지역의 양반가이자 유력 가문인 신씨 가문의 규수로 당연히 집안 내에서 신사임당의 권한과 세가 강했음은 불은 보듯 뻔한 일이다. 실제로 이원수는 지 마누라에 비해 잘난것 하나 없기 때문에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다 별 볼일 없이 생을 마감했는데, 지 애미가 애비한테 하고 자란걸 본 좃곡 이이는 자식된 새끼가 지 애비를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한다. 이 새끼는 부모에게 효를 다 하라는 유학의 가르침을 쌩까고, 지 애미 뒤진거는 평생을 두고 질질 짯으면서 지 애비 사후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완전 개쌍놈에 호로 새끼다. 거기다가 이 씨발놈의 새끼는 하마터면 민족의 성웅 이순신 충무공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꺾어 버리려 했던 전적이 있다. 사실 이순신 충무공은 임란 이전부터 북방에서 여진족과의 전투를 통해 그 혁혁한 전과를 입증해낸 명장 중에 명장이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순신은 원균과 더불어 조선사 최악의 똥별 양대산맥인 이일이라는 개좆병신 새끼한테 모함을 당해서 같이 참전한 이경록과 같이 '''전투를 이기고도 벌을 받아''' 백의종군하는 어이털리는 일을 당했다. 조정에서 이런 이순신의 공로와 능력을 보고 장차 닥쳐올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해 그를 요직에 천거하려고 할 때 이이 새끼가 요직 천거에 자기가 큰 역할이라도 한양 밥 숟갈 얹으려고 이순신을 만나고자 불렀다. 이이와 이순신은 같은 덕수 이씨 종친이였는데. 이순신 장군은 "내가 널 만나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냐. 됐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가뜩이나 좃도 없는 윾교 탈레반 이이 새끼는 여기에 열등감이 폭발하여 선조에게 이순신은 그 됨됨이를 믿을 수가 없으니 중용하면 안 된다고 생떼를 썼는데 보다 못한 유성룡이 개지랄 좀 떨지 말라고 이이 새끼를 일갈해버리는 바람에 간신히 이순신이 요직에 등용되고 조선을 풍전등화의 국난에서 구하게 된다. 즉, 이이 새끼야 말로 진짜 일본에게 나라를 헌납하려고 했던 원조 친일파 매국노 새끼다. '''3.[[층간소음]]''' 아침부터 새벽까지 매일 TV소리가 천장과 벽을 뚫어버리고 새벽에도 쿵쾅거리는 미친 노인은 유교탈레반짓으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럴 거면 왜 유교탈레반짓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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