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오스트리아 제국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빈 체제의 성립== [[File:Metternich.jpg|thumb|240px|right|빈 체제 성립의 일등공신 <br>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도 1812년부터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서 대규모 병력을 잃었고, 이 틈을 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동맹을 깨고 프랑스군을 타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12년 오스트리아는 참전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양대 잠재적 적성국인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대결을 장기화시키고, 오스트리아가 병력 소모를 딱히 하지 않는 편이 오스트리아에 이득이라는 계산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을 접견하여 프랑스와 대프랑스 연합군 간 강화를 맺게 하고자 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 중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가 고려한 끝에 프랑스 봉쇄를 위해 대프랑스 동맹에 다시금 가담하였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연합군의 수뇌부들은 라이헨바흐<I>Reichenbach</I>에서 회합하여 대프랑스 연합을 공고화하였으며, 쇼몽<I>Chaumont</I>에서의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전쟁을 수행할 것을 확약하였다. 유럽의 국가들은 이 동맹을 단순한 동맹 이상의, 나폴레옹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확산된 질서와 치안에 악영향을 주는, 자유주의ㆍ민족주의ㆍ평등사상 등을 일소하기 위한 세계 질서 유지동맹으로 여겼다. 연합군의 끈질긴 공격에 의해 프랑스 본토의 방어선마저 붕괴되고 연합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별궁에 있었고, 그가 부재한 파리는 나폴레옹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연합군과의 협상에 돌입하였다. 파리 임시정부의 수장인 탈레랑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프랑스에 대해 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파리에서의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재침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였고, 이에 대한 봉쇄망을 형성하는데 다시금 합의하였다. 연합국들은 파리 회의의 세부사항들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개최될 회의에서 조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합국은 빈에서 회의를 개최할 것을 합의했을 뿐, 어떤 국가가 참여할 것인지를 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빈 회의에는 강대국과 군소국가를 가리지 않고 나폴레옹 전쟁과 연관된 대부분의 국가(사실상 유럽의 모든 국가)가 참여함에 따라 전대미문의 대규모 국제회의가 되었다. 빈 회의는 프랑스에의 승전을 계기로 열린 국제회의였으나, 연합국은 프랑스를 강대국 자격으로 빈 회의에 받아들였다. 이는 연합국이 관대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를 참여시키는 쪽이 유럽의 안정과 질서에 이익이라는 공통적인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빈 회의에서 연합국들은 영토 재분배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프랑스의 국경선은 혁명당시의 그것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었으며 연합국, 그리고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독일영방의 문제는 핫 이슈가 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독일 영방들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규합하여 '유럽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이는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해 줄 방파제로서의 독일이 필요하다고 여긴 영국의 지지를 얻었다. 이로 인해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이 성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가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제적으로 독일의 대장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빈 체제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본 국가는 북쪽의 프로이센이었다. 빈 회의의 막후 회의인 5대국회의에 참가한 유럽 5대 강국(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국가였던 프로이센은 상기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외교협상을 하여 사실상 강대국임을 공인받았으며, 빈 회의에서 폴란드 서부와 작센 왕국의 북부 영토를 합법적으로 영유하게 되었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기 쉬운 독일 서부 라인란트에 강력한 국가가 형성되어야 프랑스를 막아낼 수 있다는 다른 연합국들의 계산 아래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라인란트의 영유권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빈 체제의 최대 승리자는 프로이센이었으며, 이는 프로이센과 같은 독일권을 배경으로 하는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독일 연방=== 신성로마제국을 대신하여 독일 연방이 독일의 새로운 연맹체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기구를 통하여 오래된 독일에서의 주도권을 다시금 공고화시키고자 하였다. 메테르니히는 이를 위해 독일어권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프로이센의 협력까지도 받아내려고 하였고, 프로이센도 이에 호응하여 연방에 참여하였다. 독일 연방은 34개 독일권 국가들로 구성되었으나 모든 국가가 동일한 수준의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 연방은 군사법과 연방 공동법을 제정하였으며, 군사법에 따라 연방 군대도 창설하였다. 연방 군대는 10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연방에서 가장 세력이 강력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각기 3개 사단, 바이에른 왕국은 1개 사단, 나머지 국가들이 모두 합해 3개 사단을 구성키로 하였다. 투표권 또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양극화는 가속화되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